그 사랑에 힘입어서일까, 우영우가 사랑했던 남방큰돌고래 비봉이가 얼마 전 17년간의 수족관 생활을 청산하고 바다로 돌아갔단다. 뉴스만으로도 잠시 미소가 생긴다.
세상을 떠난 태산이 소식도 있다. 냉동고기나 먹으며 사람들 앞에서 재롱잔치나 해야 했던 남방큰돌고래 태산이가 수족관을 떠나 바다로 돌아간 것은 2015년이었다. 그가 돌아간 바다에 재적응하느라 고초를 겪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거기서 억지광대가 아닌 자기모습대로 살다가 간 것을 좋아했을 것 같다.
고래로서의 생을 잃고 수족관에 갇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라도 고래로서 자유롭게 사는 일이 우리 마음에도 훨씬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생명을 생명답게, ‘나’를 ‘나’답게 하는 영혼의 속성 같다. 역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나와 요즘 가장 임팩트 있는 문장도 그 ‘자유’에 닿아있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왜 어린이는 놀아야 할까. 놀지 않거나 놀지 못하는 어린이는 수족관에 갇힌 고래처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싫증을 느낄 비싼 장난감이 없어도 어린이는 친구만 있으면 별 것도 아닌 것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노는 힘이 있다. 오죽하면 니체가 어린이는 최초의 놀이이며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라 했을까.
살짝 돈 것 같은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이라는 인물이 어른들에게도 시선을 끄는 이유가 있다. 그는 자기 안의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진작 자식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부모의 해방군이기도 한 것이다.
자기 안의 여유가 있는 어른만이 어린이를 자유롭게 놀게 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물고 빨며 정을 쏟는 사람들이 진작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이를 규제하고 통제하려고만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눌려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놀아야 한다. 여기저기 학원가를 돌리며 시간 관리를 해주는 부모가 건강관리도 필요하다며 일주일에 한두 번 노는 시간을 정해 강사의 지휘 하에 ‘놀이’에 참여하게 하는 것 말고! 아이는 자유롭게 친구를 만들고, 스스로 상황에 맞춰 놀이를 선택하거나 만들어 맘껏 놀 권리가 있다.
자유롭게 놀면서 아이는 친구를 만들고, 의지를 키우고, 스스로를 믿게 된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익히며 자유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놀다가 등수에 들지 못해 도태된다고 걱정하는 부모들이 있다. 오래 살아보니 알겠다. 삶은 등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등수는 자기 삶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통해 자기를 바라보는 노예의 방식이다. 공정하게 평가한다며 이 방식, 저 방식으로 등수를 매기는 것이 지금 수족관 같은 세상의 현실이라면 우리의 의지는 그 속에서 우리의 속도를 찾고 결국 우리의 바다를 찾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류시화가 엮은 '마음챙김의 시'에는 아동심리학자 데이비드 L. 웨더포드의 시가 실려 있다.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가는 태양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 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 아이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속도를 찾고 여유를 찾아야 우리 아이들이 자기의 속도를 찾고 자기 삶을 찾아간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