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초’에서 서사 가진 ‘명품 조연’으로…“이전 캐릭터와 비교해 나대용 장군이 실제 내 모습과 비슷”
“제가 '봉오동 전투'에서 정말 잔인한 일본군으로 나왔잖아요. 그런데 그걸 시사회에서 보시고 김한민 감독님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며 부르시더니 '한산: 용의 출현'의 출연 제의를 하셨어요. 처음엔 왜군 장수를 말하시는 건가 했죠(웃음). 그런데 나대용 장군님이란 분인 거예요. 왜 제게 그분을 맡기셨는진 아직도 이유를 잘 몰라요. 그냥 '봉오동 전투'를 보다가 너를 보는데 나대용 장군님이 떠올랐어,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올여름, 입소문을 타고 순조로운 흥행 항해에 나선 '한산: 용의 출현'에서 박지환에게 주어진 역할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이자 무신인 체암(遞菴) 나대용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은 익숙하지만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그의 이름 석 자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박지환 역시 김 감독이 제안할 때 나대용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런 만큼, 연기에 앞서 무엇보다 인물 공부가 우선돼야 했다.
“과학의 날(4월 21일)에 그분의 후손들이 나주에서 추모와 제사를 올리는 예식이 있어요. 그날을 디데이로 잡고 예를 먼저 보이자고 생각했죠. 그곳에 찾아가서 그분이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저의 각오를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보잘 것 없고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지만 이렇게 장군님의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장군님께서 꿈에 찾아와 주시거나 제 여정에 영감을 주시든지, 어떻게든 해주시라고(웃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날 이후부터 연기의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사료를 참고하되 그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왜 나대용이 거북선을 이끌고 반드시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격하는 것을 고집했는지를 살폈다. 완성된 학익진 안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상대 전술을 무력화시키는, '한산: 용의 출현'에서 가장 통쾌한 한산도대첩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거북선의 돌격 신에서 나대용의 존재감이 보다 뚜렷해진 것도 박지환의 이런 해석 덕이 컸다.
“거북선이 완벽하게 구축된 전술 판에 들어가 활약하는 것을 나대용 장군은 그 당시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 지점을 곱씹다 보니 그분이 가지신 군인으로서의 임전에 대한 생각이 어땠을지를 많이 곱씹어 보게 되더라고요. 또 그런 장수를 발탁해 중요한 임무를 맡긴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도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고. 사실 그런 중요한 일을 도망갈 것 같은 사람한테 맡기거나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요(웃음).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님과 나대용 장군님 사이에는 그런 신중한 신뢰 관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관계성을 통해 장군님을 다시 보려 노력했죠.”
거북선의 등장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극 중 나대용과 이순신(박해일 분)의 의견 대립이 그 직전까지 탄탄하게 스토리의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진을 완성하기 전에는 거북선을 전선에 내놓지 않으려는 이순신과 그를 반드시 설득하려는 나대용의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너울'이 바다로 이어지면서 끝내 완벽한 학익진을 완성해 낸 카타르시스가 관객들을 더욱 짜릿하게 만들었다. 박지환은 실제 촬영 현장에서도 박해일과 팽팽하게 연기를 주고받았다고 회상했다.
“박해일 선배님과 연기를 처음 하는데 감정이 너무 커서 서로 대사를 주고받을 때 템포와 흐름이 굉장한 너울로 다가왔어요. 수많은 결정과 생각을 한 끝에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게 다 생사와 승패에 직결된 것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나 봐요. 그 대화 과정에서 선배님이 준비하신 너울과 제가 준비한 너울이 섞이는데 그때 선배님 눈을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더라고요(웃음). 태풍 속이 가장 고요하다고 하는데 정말 차갑고 고요한, 그 작은 불씨 하나로 모든 걸 다 뒤덮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지환의 말대로 '한산: 용의 출현'에 등장하는 조선 수군은 모두 동(움직임) 중 정(고요함)을 취하고 있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쉽게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다. 박지환이 맡은 나대용 역시 이순신에게 거북선의 출전을 읍소하던 때와 해전 신을 제외하면 자신의 감정을 쉬이 내보이지 않는다. 박지환은 이전에 연기하던 캐릭터들과 비교해 나대용의 모습이 자신의 실제 모습과 가깝다고 말했다.
“저는 제가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웃음도 없고요. 그래도 남을 위해 배려해야 할 땐 즐거운 농담을 하기도 하고, 제가 연기한 그 수많은 모습들도 다 제 얼굴이죠. 작품 활동에서 제가 맡았던 감초 같은 캐릭터들을 보며 즐거워해 주시고, 또 그걸 제게 맞는 옷인 것처럼 봐주셨을 때 참 감사하고 그래요. 그런데 이번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웃음기가 빠진 역할인 걸 저도 나중에야 알았거든요. 저는 그냥 나대용 장군님에 집중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동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야, 너 정색을 하고 나오데?' 그러더라고요(웃음).”
올해만 해도 '한산: 용의 출현'을 비롯해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시대 첫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범죄도시2', 드라마 팬들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까지 화제작마다 이름을 올렸다. 감초 캐릭터에서 어느덧 자신만의 온전한 서사를 가진 명품 조연으로 활동 저변을 넓혀 나간 박지환이 연기에 임하는 각오는 “일이 재미없고 식상하게 느껴지면 미련 없이 이 판을 뜬다”라고 한다. 연기는 관성이 아니라 탄성이기에 끊임없이 자극 받고 움직이고 싶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올해로 데뷔 17주년을 맞은 박지환에게 영화계는 물론 광고계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 역시 마냥 안주하고 행복해 할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흥행과 대세는 자신에게 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저 처음에 그랬듯 연기로 신나고 설레며 또 다른 인물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더 이상 일에서 뭘 느끼지 못하면 할 이유가 없어요. '일은 재미없지만 그냥 돈이나 벌어야지' 하는 건 슬프잖아요. 아직 나이도 젊고 이제 겨우 시작하는 단계인데(웃음). 제가 이제까지 어떻게 연기했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그냥 ‘레디!’ 하면 지금도 떨리고 신나요. 이 두려움이 너무 재미있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시작과 만남이 있을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훌륭한 선배님들이 보여줬던 연기의 과정 속에서 제가 문을 여는 느낌이라서 더 신나고, 더 즐겁고, 더 당차게 가야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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