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해변, 사막 위에 푸릇푸릇 자라는 나무들, 휘영청 떠있는 인공 달, 일직선으로 뻗은 유리벽 안에 늘어선 건물들, 보안·물류·택배·돌봄 기능을 수행하는 로봇, 태양광·풍력을 이용한 전기 공급으로 탄소 배출 걱정이 전혀 없는 쾌적한 환경까지….
사우디 북부 타부크 일대에 건설될 미래형 스마트 도시인 ‘네옴 시티’의 청사진이다. 면적은 서울의 44배가량인 약 2만 6500㎢로 벨기에와 맞먹는 크기다. ‘네옴’은 ‘새로운(New)’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네오(Neo)’와 ’미래’를 뜻하는 아랍어 ‘무스타크발(Mustaqbal)’의 M을 합친 것으로,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래형 신도시를 지향한다.
광활한 사막 위에 건설될 ‘네옴 시티’는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를 다각화하려는 ‘사우디 비전 2030’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특히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37)가 진두지휘하기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네옴 시티’의 청사진이 처음 공개된 것은 2017년이었다.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계획 컨퍼런스에서 빈 살만이 직접 발표했으며, 이 자리에서 빈 살만은 “네옴과 평범한 도시의 차이는 구식 노키아 폰과 매끈한 스마트폰의 차이만큼이나 극명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네옴 시티’가 사우디 국민 삶의 중심지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독자적인 조세 및 노동법을 적용하고, 자율적인 사법제도를 갖춰 기존의 정부와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이런 포부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진행된 사항은 거의 없었다. 5년이 지나도록 건설 사업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이듬해인 2018년 반정부 인사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부터였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한 카슈끄지를 암살한 배후에 빈 살만이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네옴 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외국계 인사들은 슬며시 발을 빼거나 아예 투자를 철회하기도 했다. 가령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 와이콤비네이터 전 사장 샘 알트먼, 전 미국 에너지부 장관 어니스트 모니즈 등이 모두 ‘네옴’ 자문위원회를 떠났다.
빈 살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카슈끄지 암살 사건 3주 만에 열린 미래투자구상 2차 모임에서 빈 살만은 아직 남아있던 자문위원 가운데 일부를 자신의 궁전에 초청했고, 이 자리에서 카슈끄지의 죽음을 가리켜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네옴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간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침내 지난 7월 26일, ‘네옴 시티’의 3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더 라인’ 조감도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빈 살만은 “아부다비보다 더 큰 도시를 건설하겠다”라면서 해외 투자자들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천명했다. 2026년까지 45만 명을 이주시키고, 2030년 전체 도시가 완공되면 150만~20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다고도 밝혔다.
현재 ‘네옴’ CEO(최고경영자)는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 출신의 화학 엔지니어인 나드미 알 나스르가 맡고 있다. 이미 ‘아람코’에서 복잡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로 사우디 왕실의 각종 요구와 민감한 사안을 적절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스르에 따르면, ‘네옴 시티’에 적용되는 다양한 아이디어 가운데 일부는 과학소설이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다. 일례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콘셉트 아트를 담당했던 올리비에 프론, ‘다크나이트’ 3부작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였던 네이선 크롤리 등에게 도시 설계를 의뢰했다. 또한 ‘월드워 Z’와 ‘나는 전설이다’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미래학자 제프 줄리언을 고용하기도 했다.
빈 살만 본인이 사이버펑크의 미학을 좋아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사이버펑크는 과학소설의 하위 장르로, 어둡고 기술이 지배하는 지저분한 미래형 지하도시로 대변된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나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코드명 J’에 등장하는 도시의 모습이 여기에 속한다.
컨설턴트인 미국 출신의 크리스 헤이블즈 그레이는 “빈 살만 왕세자가 과학소설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면서 “때문에 사이버펑크의 미학과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네옴’ 직원들이 구상하고 있는 미래 도시와 가장 가까운 형태는 영화 ‘블랙 팬서’에 등장하는 도시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블랙 팬서’는 빈 살만이 사우디 영화관의 재개장을 허용한 후 상영된 첫 번째 영화이기도 했다.
‘네옴 시티’에 투입될 총 사업비는 5000억 달러(약 655조 원) 정도로 추산된다. 1단계 건설 사업에만 3200억 달러(약 420조 원)가 투입되고, 이 가운데 절반은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 기금에서 조달된다.
노다지 사업에 해외 건설업체들의 수주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중국, 인도 등이 대거 참여할 예정이다. 이미 2020년, 미국의 ‘에어프로덕츠&케미칼’은 50억 달러(약 6조 5000억 원) 규모의 세계 최대 그린 수소 공장을 사우디에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으며, 인도 최대의 건설사인 L&T는 지난 5월, 약 190km 길이에 달하는 송전망과 함께 태양광 발전 플랜트(2930MW), 풍력 발전소(1370MW), 배터리 ESS(400MW)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네옴 시티’ 프로젝트에 참가한 외국인 직원에 대한 처우도 파격적이다. ‘네옴’ 측이 일부 고위 주재원들에게 제공하는 70만~90만 달러(약 9억~12억 원)의 급여는 사우디 노동자 평균 급여의 20배가 넘는다. 심지어 세금도 부과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통 큰 급여 패키지 덕분에 ‘네옴’은 카슈끄지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은 후부터 외국인 직원을 유치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현재 2000여 명의 직원들 대부분은 ‘네옴’이 제공하는 사막 위 임시 주택 단지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각 가정의 요리, 청소, 빨래를 돌보는 노동자들이 함께 상주하고 있다. 보안을 의식해서 경비도 삼엄하게 이뤄지고 있다. 주택 단지는 해안에서 약 3km 떨어진 바위 언덕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에는 사설 경비원이 배치된 검문소 두 곳이 있다.
철조망 울타리를 지나면 깔끔한 잔디밭과 동일한 모양의 하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각각은 블록 15, C-83과 같은 일련의 문자와 숫자로 식별되어 있다. 식사는 중앙 식당에서 제공되며, 직원들은 전기 스쿠터를 타고 건물 사이를 이동한다. 전체적으로는 구글 캠퍼스와 교도소의 중간 정도처럼 보이긴 하지만, 단지 안에는 학교도 있기 때문에 일부 직원들은 가족과 함께 이주해서 살고 있다.
‘네옴’의 스포츠 부문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영국계 캐나다 출신인 젠 패터슨은 ‘네옴 시티’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다. 3년 전부터 ‘네옴’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손주들이 ‘네옴 시티’에서 보내게 될 나날들을 상상하면 더없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는 “6학년 초등학생의 하루를 상상해 보라. 잠에서 깨면 집 전체가 몸의 신진대사를 스캔해준다. 전날 밤 설탕을 너무 많이 섭취했다면 냉장고는 그래놀라 바 대신 죽을 권할 것이다. 등교할 때는 버스 정류장 대신 수영 레인을 찾아가 방수 배낭을 메고 헤엄쳐서 학교까지 간다”고 설명했다.
이런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과연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녹색의 최첨단 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와 관련,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도시 계획”이라면서 “아마 예산을 감당하지 못해 좌초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네옴 시티’의 선형 도시인 ‘더 라인’이 공개된 직후, ‘네옴’의 임원들 역시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도전적일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운송 및 물류 시설이 들어설 지하층을 건설하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선형 설계로 인해 막대한 초기 인프라 및 유틸리티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몇몇 전 직원들은 어림잡아 도시 건설에 1조 달러(약 1300조 원)가 투입될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또한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오랫동안 발목을 잡아온 부패 문제와 종교적 극단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 문제가 과연 쉽겠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2020년 ‘네옴’에서 일했던 미국인 임원 앤디 워스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기껏해야 겉으로만 그럴싸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라며 비난했다.
일례로 ‘네옴’이 웹사이트에서 홍보하는 “세계에서 식량을 가장 많이 자급자족하는 도시”라는 구상은 어떤가. 식량의 약 80%를 수입하고 있는 사우디 같은 중동 국가에서는 혁신적인 구상이다. 이에 대해 ‘네옴’ 측은 수직 농업과 스마트 농업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지만 옥스퍼드대학의 에너지 전문가인 마날 셰하비 박사는 “사실 고려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는 의미다.
무엇보다 물 부족 국가라는 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사우디의 경우,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하는 담수화 공장을 통해 물을 생산하는데, 현재 이 공장들은 화석 연료로 가동되고 있다. 문제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담수화 공장을 재생 에너지로 가동하려는 시도가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네옴’의 자문위원회 위원인 알리 시하비는 “중동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때문에 이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다. 우리가 중동의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비로소 ‘네옴’이 시도하는 모든 일은 가치 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206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든다는 빈 살만의 ‘사우디 그린 이니셔티브’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빈 살만이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환경에 대한 거창한 약속을 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국제기후변화 협상 전문가인 조앤나 데플레지 박사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2030년까지 세계 석유 생산량을 연간 약 5%씩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사우디는 지난해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녹색 공약을 발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석유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데플레지 박사는 “사우디가 이런 상황에서도 석유를 계속 채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라고 꼬집었다.
셰하비 박사 역시 “수도꼭지를 잠그기란 사실 쉽지 않다. 석유와 천연가스에 이렇게 많이 의존하고 있는 나라가 갑자기 자원 활용을 중단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매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사우디는 최근 2030년까지 전력의 50%를 재생 에너지로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2019년의 경우 약 0.1%의 전력만이 재생 에너지로 생산됐다. 아직 갈 길이 먼 셈이다.
이런 부정적인 전망에도 ‘네옴 시티’의 미래를 밝게 보는 사람들은 분명 많다. ‘네옴 시티’를 단지 독재자의 어리석은 망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연료전지나 기타 용도의 수소를 생산하는 50억 달러 규모의 플랜트 건설과 같은 계획들은 현재의 경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고 두둔했다.
사실 중동 사막 위에 건설되는 글로벌 허브 도시가 ‘네옴 시티’가 처음은 아니다. 두바이가 좋은 예다. 30년 전만 해도 그곳은 텅 빈 모래사막이었지만, 지금은 고층건물이 들어선 첨단 도시로 우뚝 서있다.
'170km 유리벽 직선도시 들어나봤나' 네옴 시티 3대 프로젝트
#더 라인(The Line)
주택, 학교, 공원, 직장 등이 위치한 친환경 주거 및 상업 도시 구역이다. 사막 위를 가로질러 일직선으로 뻗은 선형 도시며, 도시 전체가 길이 170km, 폭 200m, 높이 500m의 유리벽 안에 들어가 있다.
‘네옴’의 자문위원회 소속인 알리 시하비는 “도시는 블록 단위로 건설될 예정이다. 각 블록마다 상점, 학교 등의 편의시설이 있으며, 어디든 걸어서 5분 안에 도달할 수 있다. 혹은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라고 설명했다. 도시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는 고속열차로 20분 안에 이동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자동차가 필요 없다.
태양광, 풍력, 그린수소 등 100% 친환경 에너지로만 전력이 공급되고, 1년 365일 일정한 기온이 유지되며,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또한 모든 주민들에게는 무료 와이파이인 ‘디지털 에어’가 제공된다.
#옥사곤(Oxagon)
최첨단 산업도시이자 홍해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로, 팔각형 구조가 특징이다. 7km에 걸쳐 물에 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부유형 구조물이 될 전망이다. 두바 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전세계 어느 도시든 비행기로 6시간 안에 도착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현대식 산업 시설과 연구 단지를 비롯해 무역항이 들어서고, 주변에 조성되는 농경지에서는 유전자 변형 작물이 재배될 계획이다.
#트로예나(Trojena)
친환경 산악 관광단지로 스키를 비롯한 각종 레저 스포츠를 1년 내내 즐길 수 있다. 야외 스키장은 사우디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해발 1500~2600m에 조성될 계획이다. 산 정상은 때때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제설 장비만 충분하면 겨울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다만 환경 문제가 걸림돌이다. 리조트에 건설될 인공 호수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주변 경관의 많은 부분을 폭파해야 하며, 이에 따른 막대한 비용은 아직 추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