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롯머신에 몰두하고 있는 일본 여성. 로이터/뉴시스 |
일본 후생성의 2010년 통계를 보면, 일본의 성인여성 중 1.6%가 도박중독자로 추산된다. 인구로 환산해보면 무려 75만 명에 달하는 수치며, 불과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최근 일본의 정계는 관광산업을 부흥시키겠다며 초당파적으로 카지노 합법화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도박 중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카지노 도입 움직임이 된서리를 맞고 있다. 일본 공영방송 <NHK> 보도를 중심으로 일본 여성의 도박중독 실태와 그 특징을 살펴봤다.
일본 여성의 도박중독 증가 추세를 반영하듯 2~3년 전부터 관련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남편과 가족 몰래 도박을 하다가 생활비를 날려 이혼을 당하는 주부는 이제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할 정도다. 도박 자금을 마련하거나 도박 빚을 갚으려고 불법 사채를 여기저기서 끌어 써 돌려막거나 직장의 공금을 횡령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지난여름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한 엄마가 폭염이 쏟아지는 날 3세 아이를 자가용 안에 놔두고 3시간 동안 파친코에 몰두했고, 아이는 질식사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부부가 함께 파친코에 빠져 데리고 온 아이를 유괴당한 사건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도박중독 여성 거의가 파친코 중독자란 사실이다. <NHK>에서 도박중독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다수는 경마나 경륜보다 파친코를 선호한다. 실제 낮 시간에는 파친코 가게 고객 중 절반 정도가 여성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파친코업소 내부. 일본에선 여성 고객을 위해 여성 종업원을 채용하거나 실내 금연 등을 벌이고 있다. |
더욱이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불황으로 영세 파친코 업체가 줄줄이 도산하면서 여성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나선 점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 전국 파친코 가게 수는 전성기 1990년대 당시 4만여 개에서 현재 2만 개 정도로 절반이나 줄었다. 그래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예를 들어 ‘레이디스데이’라며 주중에 여성전용 출입 일을 정하거나 종업원을 모두 여성으로 뽑는다. 깨끗한 환경을 좋아하는 여성을 위해 아예 실내 금연을 실시하기도 하고, 파친코 가게 내 시끄러운 소음을 싫어하는 여성을 위해 소음 방지 헤드폰을 대여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박이 나 인기가 있는 파친코 머신 앞에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장장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여성 고객을 위해 무료로 네일아트를 해주거나 디저트를 나눠주기도 한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파친코가 일종의 오락 산업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일단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도박중독 남성처럼 자기 자신도 경제적·심리적으로 파탄이 날 뿐만 아니라 가족마저 거액의 도박 빚을 지고 실의에 빠지게끔 만든다. <NHK>가 인터뷰한 한 40대 여성은 3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파친코를 하면서 도박 밑천을 마련하고자 카드론과 사채로 600만 엔(약 8900만 원)이나 썼는데, 큰돈을 쓰다 보니 나중에는 지폐 한 장이 마치 휴지조각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도저히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가족은 등을 돌렸다. 딸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남성과 확연히 다른 점도 있다. 여성은 비교적 단시간 내 도박중독이 된다. 일본의 도박중독 치료 전문 정신과의 이와사키 마사토 씨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남성이 17~18년에 걸쳐 도박중독 중증이 되는데 비해 여성은 평균 10년 이내에 중증이 된다.
일단 도박중증이 되면 도박자금을 마련하고자 혈안이 된다. 심지어 파친코 가게 내에서 구슬이나 칩을 많이 딴 남성에게 대담하게 접근해 성매매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 포털 뉴스 <니프티>에 따르면 소위 ‘파친코 즉석 성매매’가 있다고 한다. 파친코를 하다가 돈을 잃고 낙심한 여성이 또 도박을 하고 싶어지면, 재빨리 주위를 둘러봐 파친코 구슬을 가득 쌓아 놓은 남성에게 다가가 거래하는 방식이다. 간단한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보수를 표시한다. 예컨대 손가락 두 개를 펴면 구슬 바구니 두 개를 달란 뜻이다. 여성은 현금을 받는 대신 구슬 바구니를 받아 여성이 직접 환전소에서 가서 돈으로 바꾼다. 그리고 나선 근처 모텔 등에서 얼른 일을 치른 후 돌아와 성매매로 마련한 돈으로 다시 파친코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까지 도박중독이 되는 이유는 뭘까? 남성이 일로 비롯된 중압감으로 인해 도박에 빠져드는 데 반해 여성은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도박에 빠져든다. 이와사키 씨의 분석에 의하면, 여성 중에서도 가사만 하면서 타인과의 대화나 교류가 거의 없는 상태인 젊은 30~40대 가정주부가 고위험군이다. 육아로 인한 피로, 고부 갈등, 외로움 등으로 기분전환을 하고자 파친코에 들렀다가 차츰 도박중독이 되는 것이다.
<NHK>가 인터뷰한 한 30대 주부는 유산을 하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울적한 마음에 처음으로 파친코에 들렀다. 그런데 돈을 따게 되자 매일같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파친코에 가게 됐다고 한다. 이런 점은 다른 세대 여성들과도 구별된다. 20대 여성은 남자친구를 따라가는 등 우연치 않게 도박을 접했다가 잃은 돈을 만회하고자 점점 돈을 쏟아 붓는다. 50대 여성은 생활비를 벌어보려던 게 도박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 한다.
한편 도박중독의 심각성이 여러 차례 보도되면서 현재 일본 정계가 합심해 추진 중인 카지노 합법화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여당 민주당과 야당 자민당, 공명당 소속 의원 74명이 속한 ‘국제관광산업진흥 의원연맹’은 올가을 일본 국내 카지노 특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카지노구역 정비추진법안’을 마련한 바 있다. 카지노로 관광산업을 활성화해 내수를 촉진하고 2011년 3월 원전사고 이후 보상비 마련 등 늘어난 세수를 충당한다는 목적이다. 이 법안은 2012년 첫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하지만 소규모 불법 카지노도 있는 마당에 합법적 카지노 단지까지 생기면 일본 내 도박중독자 수가 더 늘어나는 등 폐해가 클 것이란 비판도 거세다. 더욱이 여론도 좋지 않아 법안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