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국가나 도시 혹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을 뜻한다. 전쟁 등을 거치며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한 건물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각 지역마다 랜드마크 반열에 올라서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당시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우던 기업들과 연관이 깊다. 이 때문에 해당 랜드마크의 역사는 기업 또는 산업의 역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물은 시장과 산업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일요신문이 각 지역 랜드마크와 기업이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일요신문] 서울시 중구 동대문시장 일대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상권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물, 잡화 등을 취급하는 이현시장이 이곳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장시장이 설립돼 명맥을 이어갔고, 해방 후에는 평화시장이 들어서면서 '의류 하면 동대문시장'을 떠올릴 정도로 성장했다. 동대문시장 상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명동, 강남 등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1990년대 현대식 유통업체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당시 동대문시장 상권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곳은 일명 ‘두타몰’로 불리는 동대문 두산타워다. 두산타워의 등장으로 동대문시장 일대는 기존 재래식 시장 이미지를 탈피해 신세대들의 명소로 거듭났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잠재력이 높은 상권 중 하나로 꼽힌다.
동대문 두산타워 부지는 과거 덕수상업고등학교(현 덕수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덕수상고가 1978년 서울시 성동구로 이전하면서 ‘별표 전축’으로 유명했던 음향기기 업체 천일사가 해당 부지를 인수했다. 천일사는 1979년 계열사인 덕수종합개발에 덕수상고 부지를 넘기면서 본격적인 개발을 추진했다. 덕수종합개발은 면목동에 종합 스포츠 레저 센터를 조성하는 한편 안양시 석수동에 ‘덕수 아파트’를 건설해 아파트 분양 시장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건설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덕수종합개발은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서울시가 옛 학교 부지에 고층 건물 개발 억제 정책을 펴면서 덕수상고 부지 개발도 지지부진했다. 결국 두산그룹이 1988년 덕수종합개발을 인수했고, 자연스럽게 덕수상고 부지도 두산그룹 소유가 됐다.
두산그룹 역시 덕수상고 부지에 고층 건물 개발을 추진했고, 끝내 서울시 승인을 받는 데에 성공했다. 두산그룹은 1998년 12월 지하 7층 지상 34층 규모의 두산타워를 완공해 1999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주)두산 등 두산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두산타워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동대문 시대를 열었다.
동대문 두산타워는 동대문시장 인근을 국내 최대 패션 상권으로 급부상시켰다는 의미도 있다. 사실 평화시장, 통일상가 등이 1960년대 들어선 이후 동대문시장은 패션 상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강남이나 명동 지역 상권이 약진하면서 동대문시장은 촌스럽다는 이미지가 없지 않았다.
두산그룹은 두산타워 건설 당시부터 동대문 상권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김홍구 전 (주)두산 사장은 두산타워 오픈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두산타워의 등장으로 동대문 상권에 본격적으로 상권 재편 바람이 불 것으로 생각한다”며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동대문 패션이 새롭게 부각되는 기회도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두산그룹은 두산타워 지하 2층부터 지상 7층까지 패션 매장을 입주시켰다. 이전까지 동대문시장에는 재래시장 형식의 의류 도매 업체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식 대형 유통업체의 등장은 신세대들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두산타워 뒤편에는 바이킹, 타가디스코 등 놀이 시설까지 등장하면서 10대들도 자주 찾는 명소가 됐다. 비슷한 시기 거평프레야, 밀리오레 등이 인근에 오픈해 시너지 효과를 냈고, 이에 따라 동대문시장 일대가 ‘동대문 패션타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비단 한국 젊은이들만 동대문 패션타운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동대문 패션타운을 방문할 정도였다. 이에 문화관광부는 2002년 동대문 패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동대문 패션타운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패션업계에서는 서울시가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를 시작하면서 동대문 상권의 하락세가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공사로 인해 평화시장 인근 노상주차가 어려워졌고, 교통체증까지 더해지면서 동대문 패션타운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명동, 강남 상권은 나날이 발전했고 온라인쇼핑몰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까지 등장했다.
두산타워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유명 브랜드를 입주시키고, 문화시설을 마련해 평화시장 등과 차별화를 둘 수 있었다. 자체적으로 지하주차장이 있었기에 주차 문제에서도 자유로웠다. 거평프레야를 운영했던 거평그룹과 달리 두산그룹에 큰 내홍이 없었던 것도 두산타워 안정적인 경영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동대문 패션타운을 찾는 사람이 줄어든 것 자체가 두산타워에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한동안 침체기였던 동대문 패션타운에는 2010년대 중반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2014년 정식으로 문을 열면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옛 거평프레야 건물을 임차해 2016년 현대시티아울렛을 정식으로 오픈했다. 거평프레야는 한때 두산타워의 라이벌이었지만 거평그룹이 1998년 IMF 외환위기로 해체된 후 경영권 분쟁에 휩싸이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다. 2008년 케레스타로 이름을 바꾸고 대대적인 마케팅에 나섰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두산그룹도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2016년 면세점 사업권을 획득해 두산타워 7~15층에 두타면세점을 오픈했다. 당시 면세점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망한 사업이었다. 두타면세점 관계자는 오픈 당시 “당분간 면세점 조기 안정화에 집중하고 지속적인 브랜드 유치 노력을 통해 더욱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하반기에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면세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두산그룹의 면세점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사업이 됐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줄었고, 다른 면세점과 비교해 큰 차별화를 두지도 못했다. 두산타워 운영법인인 두타몰의 매출은 2016년 734억 원에서 2017년 629억 원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315억 원에서 281억 원으로 감소했다. 두타몰 법인은 2018년 3월 경영 효율성 제고를 이유로 (주)두산에 흡수합병됐다. 결국 두산그룹은 2019년 면세점 사업권을 반납하고, 재고 및 유형자산은 현대백화점그룹에 매각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이후 면세점 사업권을 추가 획득해 옛 두타면세점 자리에 현대백화점 면세점을 새롭게 오픈했다.
두산그룹은 당시 그룹 전반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기에 면세점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두산건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겪었고,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 등 계열사의 두산건설 지원은 결국 두산그룹 위기로 이어졌다. 두산그룹은 2016년 두산건설 HRSG(배열회수보일러) 사업부 매각을 시작으로 두산DST, 두산공작기계, 두산엔진, 두산인프라코어 등 핵심 계열사들을 팔았다.
그러나 두산그룹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2020년 두산타워까지 매각하기에 이른다. 두산타워는 두산그룹의 상징처럼 여겨진 건물이었지만 회사의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인수자는 마스턴투자운용, 매각가는 8000억 원이었다. 다만 (주)두산 등 일부 계열사는 두산타워에 임차 형식으로 입주해있어 두산그룹과 두산타워의 인연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건물명도 여전히 두산타워다.
일각에서는 동대문 패션타운에 관심을 보인 오세훈 서울시장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동대문 일대는 옥외광고특구 지정을 서둘러서 야간 매출 증대에 도움을 드리고, 동대문 패션시장 운영으로 야시장도 다시 활성화하겠다”며 “DDP와 동대문 일대를 뷰티산업 핵심거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상권 부흥의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