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로 연기파 변신 후 필모그래피 탄탄히 쌓아…감독 데뷔작 ‘헌트’ 호평, 아카데미까지 정조준
#‘Since 1995년’ 28년 차 스타
이정재는 대표적인 길거리 캐스팅 출신 스타다. 정확히는 길거리가 아닌 카페에서 캐스팅이 이뤄졌는데, 서울 압구정동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다 연예관계자의 눈에 띄어 모델 활동을 제안 받았다. 정식 데뷔년도는 1993년으로 모델 이정재가 출연한 초콜릿 CF 광고가 크게 화제가 됐고, 그해 SBS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배우 데뷔도 했다.
이정재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알린 작품은 1995년 방영된 SBS 드라마 ‘모래시계’다. ‘윤혜린’(고현정 분)의 보디가드인 ‘백재희’ 역할로 출연한 이정재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 배우였지만 드라마 종영 즈음엔 주연인 최민수와 박상원 등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말 그대로 스타 탄생의 순간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이정재는 최고의 청춘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군림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이정재 출연작에는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과 호흡을 맞추며 절친이 됐고, 1990년대 최고의 여성 스타 심은하와는 ‘이재수의 난’ ‘인터뷰’ 등 두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심은하와는 드라마 ‘백야3.98’에도 함께 출연했는데 이 드라마는 최민수, 이병헌, 신현준 등과도 함께했다. 또한 ‘시월애’에선 신인 전지현과 호흡을 맞췄고, 이영애와도 영화 ‘선물’을 함께했다.
다만 검증된 스타성에 비해 연기력에선 한계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배우 데뷔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지내다 길거리 캐스팅된 모델 출신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정재의 출세작 ‘모래시계’의 백재희 캐릭터는 완벽하게 과묵한 남성으로 설정돼 있어 대사가 거의 없다. 당시에는 이정재의 대사 소화 능력이 너무 부족해 백재희가 대사 없는 캐릭터로 설정됐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다.
#‘Since 2010’ 13년 차 연기파 배우
2000년대 들어 이정재는 다소 정체기를 걷기 시작한다. ‘태풍’ ‘1724 기방난동사건’ 등의 영화가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고, 드라마 ‘에어시티’ ‘트리플’ 등도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서서히 ‘한때 잘나갔던 스타’, ‘이제는 한물 간 스타’ 정도로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돼 가고 있었다. 어느덧 1990년대 최고의 청춘스타이던 이정재의 나이도 서서히 30대 중후반을 지나 40대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이정재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점은 2010년으로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가 기폭제 역할을 한다.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이 영화를 통해 스타 이정재는 연기파 배우 이정재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이런 기세가 2012년 ‘도둑들’로 이어지면서 이정재는 천만 관객 배우 자리에 오르게 된다. 40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연기력과 흥행력에서 두루 좋은 평가를 받는 배우로 거듭나며 진정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셈이다.
2013년 영화 ‘신세계’와 ‘관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탄탄한 연기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정재는 2015년 ‘암살’을 통해 쌍천만 관객 배우가 된다. 특별출연이지만 염라대왕 역할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인 ‘신과함께’ 시리즈 두 편도 모두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외에도 영화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비롯해 드라마 ‘보좌관-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 등에 출연한 이정재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
#‘Since 2021’ 2년 차 월드스타
27년 차 스타이자, 12년 차 연기파 배우이던 2021년의 이정재에게 또 다른 변화가 벌어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출연을 계기로 이정재는 2021년 비로소 ‘월드스타’라는 타이틀까지 품게 된다.
2022년 2년 차 월드스타가 된 이정재는 9월 12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SAG(미국배우조합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크리틱스 초이스 슈퍼 어워즈 등 미국 주요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쓴 이정재가 비로소 미국 방송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배우 최초는 기본,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의 에미상 수상이다.
제레미 스트롱(석세션), 브라이언 콕스(석세션), 아담 스콧(세브란스: 단절), 제이슨 베이트먼(오자크), 밥 오든커크(베터 콜 사울) 등 막강한 후보들 사이에서 결국 이정재의 이름이 호명됐고, 무대 위에 오른 이정재는 한국어로 “대한민국에서 보고 계시는 국민 여러분과 친구, 가족, 소중한 팬들과 기쁨을 나누겠다”고 말했다. 에미상 시상식에서 비영어권 드라마로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감독이 된 황동혁 감독이 영어로 수상소감을 밝힌 것과 대비됐다.
시상식이 끝난 뒤 기자간담회에서 이정재는 “아까 한국말로 꼭 이야기하고 싶어서 한국말로 소감을 밝혔는데, 진짜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관객 여러분을 항상 생각하고 일을 하기 때문에 늘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흥행이 잘 될 때나 관객의 마음에 잘 안들 때도 항상 관객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그래서 아까 한국말로 소감을 밝혔다. 감사하다, 진짜로”라고 밝혔다. ‘2년 차 월드스타’로 그 정점에 선 이정재지만 ‘28년 차 스타’이자, ‘13년 차 연기파 배우’로 굳건한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해준 대한민국 국민(관객)에게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한국어 수상소감이었던 셈이다.
#‘Since 2022’ 1년 차 영화감독
이정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스타지만 외국인들의 시선에선 아직 다소 낯설지만 강렬한 신예 배우다. 월드스타로서는 아직 2년 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정재의 도전은 계속된다. 그렇게 2022년은 이정재에게 감독으로 데뷔한 해라는 남다른 의미가 더해졌다. 이제 그는 ‘1년 차 영화감독’이다.
‘1년 차 영화감독’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는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 등과 여름 극장가에서 격돌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흥행 메이커인 거장 감독들에게 1년 차 영화감독이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었는데 결국 ‘헌트’는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흥행 2위를 기록하는 저력을 뽐냈다.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 역시 ‘한산: 용의 출현’과 ‘헌트’뿐이다.
‘1년 차 영화감독’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미 제75회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공식 초청된 ‘헌트’는 국내 개봉에 이어 이제 본격적인 해외 개봉을 앞두고 있다. 특히 12월에는 미국 전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비록 ‘헌트’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선정한 제95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한국 영화 출품작이 되진 못했지만 아카데미 진출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아카데미영화상 출품 자격이 미국 6개 대도시권인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마이애미, 애틀랜타 등에서 개봉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번 에미상 수상으로 2년 차 월드스타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한 이정재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소화한 영화인 까닭에 미국 현지에서도 ‘헌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잘 하면 ‘1년 차 영화감독’ 이정재가 ‘2년 차 영화감독’이 되는 2023년 봄에는 아카데미에서 오스카상까지 거머쥘지도 모른다.
김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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