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의 세종대왕. 사진제공=sbs |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지만, 거기에 한문 실력을 겸비한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고서를 뒤지는 일이 취미다.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와 기록을 수시로 발굴해 특종하고 있다. 덧붙여 그는 소싯적인 1986년에 <스포츠서울> 대중문학상 공모를 통해 등단했고 이후 10여 권의 작품을 발표한 소설가다. 바둑책도 이번이 세 권째다. 희소가치 있는 바둑인, 바둑계의 귀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제1, 2장은 가령 이런 내용이다. 세종대왕이 바둑을 좋아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사단장이 바둑 잘 두는 졸병을 옆에 두듯, ‘바둑 전담’ 신하를 발탁했다든가, 세조가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한명회 신죽주 구치관 최항 등 바둑 두는 정승들을 모아 ‘편바둑’을 두게 하고 이긴 쪽에게 상금을 주었다든가, 처절한 당쟁과 피로 얼룩진 사화(士禍) 중 어떤 것은 바둑이 단초가 되었다든가,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늘그막에 하수들과 바둑을 두며 골려먹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든가 하는 일화들과 당시 동양3국 바둑계의 사정과 국제 바둑교류, 당대 석학들의 글씨 한시 그림들에 들어있는 바둑, 그들이 아꼈던 바둑판 등등 흥미진진한 얘기가 줄지어 등장한다.
프로-아마 바둑 고수 중에는 바둑 덕분에 군대 생활 편하게 했다는 사람이 많은데, 옛날에도 그랬던 모양이고, 편바둑이라면, 승패만 따졌던 것일까, 요즘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 편이 1승2패로 졌더라도 1승한 사람이 40집을 이기고, 패한 사람이 10집과 5집을 졌다면 우리가 이긴 것이듯, 집수까지 세었던 것일까.
제1, 2장도 재미가 넘치지만, ‘승정원일기 속의 바둑 기록’을 끄집어낸 부록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의 투철한 기록정신, 탁월한 기록문화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하루하루 승정원에서 보내고 받은 문서와 매일의 사건을 기록한 그 일기장에 바둑 얘기가 좀 과장한다면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저자가 결론 삼아 하고자 했던 말은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조선은 전 시대를 통해 바둑이 성하던 나라였다… 바둑은 조선의 국기(國技)였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찾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던 그 (바둑)노래를 찾아 다시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 땅의 모든 바둑인들과, 바둑인들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말입니다”라는 것. ‘바둑은 조선의 국기였다.’ 통쾌한 말이다.
이세돌 9단이 자서전을 펴냈다. 이제 나이, 해가 바뀌어 불과 스물아홉. 자서전을 쓰기에는 아직 좀 그런 나이인 것 같으니 자서전보다는 자전적 에세이 정도로 해두자. ‘판을 엎어라’ 제목이 도발적이다.
1월 6일 서울 광화문 부근 한정식집에서 ‘맥심커피배 8강 진출자 기자간담회’를 겸한 오찬이 있었다. 맥심커피배는 ‘입신들의 대회’로 불린다. 프로9단만 출전하는 대회이고, 9단의 별칭이 ‘입신’이다.
8강 진출자는 이세돌 9단을 비롯해 백성호 이상훈 안조영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박정환 9단이다. 과연 입신 중에서도 별들의 잔치임이 실감난다. 50대 중반의 백성호 9단(56)이 단연 돋보인다. 다음이 올해 서른아홉 되는 이상훈 9단. 이세돌 9단이 친형 이상훈 8단(37)이 아니다. 그 다음이 안조영 9단으로 서른셋이고, 이세돌이 스물아홉,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이 스물일곱, 막내 박정환이 열아홉이다. 8강 진출자 중 좌장으로 건배를 제의하면서 백 9단이 말했다.
“제가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입회인이시냐, 해설자시냐, 그렇게들 물으시더라구요. 저도 제가 이 자리에 낀 게 이상하긴 한데…^^ 더 이상한 것은 지난해 시니어 중에서는 유일하게 삼성화재배 32강 본선에 올라갔고, 이번엔 맥심배 8강에 들어갔네요…아무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헤어질 때 이세돌 9단이 부리나케 앞으로 나가더니 상자 하나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바로 이 책, <판을 엎어라>가 들어 있었다. 책을 본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 첫 마디가 “과연 이세돌답다”였다.
“방금 나온 건데, 한 권씩 드리고 싶어 가져왔어요.”
“맘에 안 들면 엎어 버리겠다, 이건가?…^^”
“아마추어들한테 좋은 걸 가르쳐주네. 하하. 나도 이제 바둑 두다 안 되겠다 싶으면 지면 쓸어야지.”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 되고, 매너 나쁜 사람한테만 그래.”
사람들은 줄을 섰고 이세돌 9단은 웃으며 일일이 사인을 해주었다. 이세돌 9단이 많이 변했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많이 겸손해진 모습이다.
전남 신안 앞바다, 가난한 어촌 출신(이세돌의 부모님은 주업이 농사였다고 하지만)의 말썽쟁이, 개구쟁이 소년이 세계 바둑 제일인자가 되기까지, 어린 시절부터 입단 초기 잠시 방황했던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의 얘기가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비금도 앞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