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고 시절, 우리는 대부분 가난했지만 가난이 부끄럽지도 않고 황폐하지도 않았다. 그때도 명품을 즐겨 입고, 성형을 하고, 엄청난 비용을 내고 과외를 하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사람의 값을 매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부자는 부자고 물건은 물건이었다. 물건값이, 돈값이 사람값이라고는 추호로 생각하지 않을 만큼은 우리는 건강했던 것이다.
대문 밖에만 나가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고, 흙에서 뛰어놀고, 한방에서 복작복작 24시간을 조율해야 하는 자매 혹은 형제가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를, 요즘 아이들을 보며 깨닫는다. 네모난 아파트, 네모난 빌딩 학원, 네모난 컴퓨터, 네모난 휴대폰 세상에 갇혀 우리는 흙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입맛을 잃었고, 정을 잃었다.
그렇게 뱃심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물건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 뉴스에서 특정 브랜드의 패딩을 입을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가격대의 패딩을 입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그룹이 나눠진다는 얘기는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얘기를 듣고 사실은 잊었었는데, 오, 세상에, 나는 놀랐다.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그림으로 읽는 철학’ 특강을 두 차례를 했는데, 거기서 남학생들의 대부분이 그 브랜드의 패딩을 입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패딩이 교복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그 옷을 좋아하나 봐요. 그 옷이 왜 좋죠?”
내 갑작스런 질문에 옷을 입은 아이들이 당황했는지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특정한 옷을 좋아하는 건 취향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특정한 옷을 입어야만 학교에 가고 친구들 사이에서 기가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쩐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까 내 조카 하나가 그 옷을 입고 싶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아마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게 그런 건 줄도 모르고, 아이가 패딩 하나가 필요한데 그 브랜드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해서 나라도 사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뉴스를 본 터라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 “건희야, 네 자신이 명품인데, 왜 소위 ‘명품’으로 너를 가리니?”
나는 조카와 있었던 일화를 얘기해주고 준비해간 강의를 했다. 다음 시간, 그 브랜드의 옷을 입고 온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또 한번 놀랐다. 그건 교육이 되는 거였다.
아이들이 그 브랜드의 옷으로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으로 사람값을 매기고 있는데, 교육을 하지 않는 건 ‘취향’ 뒤에 숨어 학교가 교육을 포기한 것이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쓸데없이 두려워해서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