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학교를 찾는 사람들
평소 산을 좋아했지만 둘레길 산책이나 쉬운 능선 트레킹 정도만 했던 기자에게 암벽등반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등산학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등산학교는 말 그대로 산에 대한 모든 것, 등산의 A to Z를 배울 수 있는 학교다. 등산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동시에 가르친다. 배낭꾸리기부터 등산 요령을 비롯해 독도법과 매듭법, 암벽등반까지 배운다. 그중 암벽등반에 가장 힘을 쏟는다. 봄·가을이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암벽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등산학교 학생들도 상당수다.
등산학교도 여럿 있다. 한국등산학교, 국립등산학교, 코오롱등산학교, 서울등산학교, 정승권등산학교 등 여러 국·공립·사설 등산학교가 있는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한국등산학교에 등록했다. 연륜은 아무래도 무시할 수가 없다. 한국등산학교는 1974년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등산학교로 서울시산악연맹 산하에 있다.
9월 첫째 주 개강한 한국등산학교에 모인 30여 명의 학생들의 면면이 천차만별이다. 최근 등산은 코로나19로 인해 MZ세대까지 저변이 확대됐다. 주요 산행객이던 5060 중장년층은 물론 자기계발을 즐기는 2030에게도 새로운 놀이가 됐다. 그렇게 아저씨와 아가씨가 저마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로 산을 찾는다. 등산학교에 모인 교육생의 연령도 다양하다. 23세 아가씨부터 63세 아저씨까지 ‘동기’라는 이름으로 친구가 된다.
23세 20학번 음대 학생인 김 아무개 씨는 “대학 3학년인데 아직 제대로 대학생활을 하지 못했다. 대학을 입학한 2020년에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대학 오티(OT·오리엔테이션)나 엠티(MT)는 물론 오프라인 수업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내내 실내에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사람 접촉 없이 야외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등산과 암벽등반에 취미를 갖게 됐다”고 소개했다.
암 수술 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등산학교에 등록한 50대 중반의 남성인 남 아무개 씨는 “몸이 불편하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입학 동기를 설명했다.
본인이 가장 나이가 많다고 소개하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63세 양 아무개 씨에게 30대처럼 보이는 이 아무개 씨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저질체력 소유자라 여기서 내가 제일 노약자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부부가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함께 온 사람도 두 팀이나 있었다.
평소 등산을 즐기다가 우연히 암벽에 매달린 사람들을 본 후 암벽등반을 배워보고 싶어 등산학교에 등록했다는 40대 후반의 여성 이 아무개 씨는 “등산을 자주 다니다 보니 약간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암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호기심도 생겼다. 유심히 보니 여성들도 꽤 있는 거 같아 용기를 갖고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32명의 교육생 가운데 여성은 6명이다.
#암벽과의 밀당
등산의 기술을 배우며 산에서 삶을 묻고 길을 묻고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 평범함과 비범함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에 있지 않다. 나이를 불문하고 평생 해보지 않았던 생경한 것에 대한 도전 자체에 비범함이 묻어 있다.
한국등산학교 과정은 도봉산장과 그 인근에서 총 6주 동안 주말 내내 이루어진다. 교육생 32명에 강사가 15명이다. 몸을 쓰는 배움인 만큼 강사진이 촘촘하다. 토요일엔 이론을 배우고 일요일엔 인근 암벽으로 실습을 나간다. 1~3주차는 도봉산장 인근에서 수업이 이루어지고 4주차엔 오봉, 5주차엔 인수봉, 6주차엔 선인봉 오르기를 끝으로 마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수업이 있어 개인의 선택에 따라 1박 2일 동안 도봉산장에서 숙식도 할 수도 있다.
비가 왔던 1주차에는 실내 이론 수업 위주로 진행됐는데 암벽 등반을 위한 매듭법과 암벽에서의 확보 및 하강 등을 숙지하는 과정이었다. 2주차에 드디어 본격적인 암벽등반실습이 시작됐다. 15m 정도의 짧은 암벽 구간이지만 경사는 꽤 가팔랐다. 접지력이 좋은 암벽화를 신었지만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전은 확실히 이론과 다르다. 몸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론시간에 배웠던 확보와 하강 등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배우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가파른 암벽은 몸을 쓰라며 계속 쓴소리를 뱉었다. 암벽이 쓴소리를 낼 때마다 교육생들의 입속에서도 악소리가 터졌다.
갑자기 원시의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네 발로 기는 것도 힘든 암벽 위에서 손가락은 암벽의 틈을 비집으며 돌의 거친 면을 애써 부여잡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잔뜩 힘을 준 발가락 끝에 온 힘이 실린다. 몸을 지탱하는 것도 잠시, 다시 다리를 뻗어 암벽 위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옮겨 디딘 발끝은 여지없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한동안 가슴부터 무릎까지 암벽과의 거친 애무가 이어진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암벽이 매끈하고 편편한 가슴을 내밀며 응수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야 한다. 평지처럼 자신 있게 내딛지 못하지만 암벽과 은밀한 밀당을 나누며 조금씩 간을 본다. 다행히 암벽 꼭대기에 지원군이 있다. 등반자 허리의 하네스와 연결한 줄 끝으로 저 위에 구세주의 손길이 보인다.
#믿음의 로프
생명줄 로프를 쥐고 연신 미끄러져 내리는 등반자를 끌어 올려줄 사람은 이 암벽을 네 발로 먼저 기어 올라간 선등자다. 선등자와 후등자는 서로의 생명줄을 쥔다. 선등자가 오를 때 후등자가 뒤를 봐주고, 후등자가 오를 때 선등자가 팽팽하게 줄을 당긴다. 평균보다 체력이 좋지 않은 초보 후등자를 위해 선등자는 힘을 좀 더 써줘야 한다. 선등자 없이 후등자는 결코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선등자만 믿고 있다가는 한 뼘도 오를 수 없다. 후등자의 오르는 기세가 있어야 선등자의 줄도 힘을 받는다. 혼자 하는 암벽 등반이 아니다. 적어도 암벽 위에서는 나 혼자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혼자서는 마음 놓고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없다. 먼저 간 누군가가 혹은 아직 오르지 않은 누군가가 받쳐주고 당겨 주어야 오를 수 있고 내릴 수 있다.
암벽등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미끄러져 내릴 거라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미끄러져 내린다. 반면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하면 오르게 된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파트너에 대한 믿음이 어마어마한 직벽을 차츰 오르게 한다.
혼자 살아온 인생이라고, 혼자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이가 있다면 암벽에 올라보라. 그 믿음은 채 5분도 안되어 깨질 테다. 믿음을 놓는 순간, 서로의 몸을 묶고 있던 로프도 놓친다는 사실. 암벽 위에서 사람을 잇고 있는 로프는 믿음의 다른 말이다.
평생 처음으로 겨우 겨우 로프를 의지해 15~20m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또 내렸다. 혼자서 한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를 성취감이 인다. 곡소리를 내며 오르는 과정은 짠했지만 등반 성공 후 맛보는 쾌감은 남다르다. 하지만 이건 ‘맛보기’였을 뿐, 실전은 이제부터다.
[암벽등반 체험기②]로 이어집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