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런 심각한 상황이 우리에게만 닥쳐오는 것은 아니다. 영국마저 국제통화기금, 즉 IMF 구제 금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전직 골드만삭스 수석 통화 전략가인 짐 오닐에 따르면, 엔화가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 1997년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한다. 과거 IMF 외환위기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등골이 오싹해질 것이다.
이렇듯 미래가 지극히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선 정치가 제 역할을 해 줘야 한다.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포퓰리스트가 득세하거나 극단적 이념 성향을 가진 정당 혹은 정치인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최근 선거를 치른 이탈리아를 보면 이런 현상을 잘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우파 연합이 승리를 거뒀는데 총리로는 극우 정당의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가 확정됐다. 여성 무솔리니라고도 불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극우 성향을 보이는 멜로니 신임 이탈리아 총리는 자신을 “어머니, 이탈리아인, 기독교인”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과거 무솔리니 파시즘이 “신, 조국, 가족”을 강조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극우 세력의 대두는 비단 이탈리아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프랑스에서의 르펜의 대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영 딴판이다. 여당은 대통령의 순방 때 벌어진 ‘비속어 논란’을 수습하기보다는 오히려 키우고 있다. 야당은 이번 순방을 외교 참사라며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정치권의 현실 인식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정치권이 현재 상황을 심각한 위기라고 보고 있다면 툭하면 정치적 사안을 법원으로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며 상대에 대한 공격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여야의 극심한 갈등이 노출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국정감사가 10월 4일부터 시작되고 동시에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가 낸 가처분 인용 여부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나온다는 점이다. 만일 법원이 이번에도 가처분을 인용한다면, 국민의힘은 지도부 공백이 발생해 그야말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3차 비대위를 꾸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최고위를 꾸리기도 힘들다.
또한 이준석 전 대표 측이 새 원내대표의 선출을 결정한 비대위가 무효이기 때문에 주호영 원내대표 선출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또다시 가처분 신청을 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의힘은 진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가처분이 기각될 경우, 그나마 국민의힘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또다시 정쟁에 몰두한다면 국정 안정은 기대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야당도 현재와 같은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야당도 공당으로서 정치적 과정에 책임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야당이 위기 극복을 위해서 정부 여당을 정신 차리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고 정부 여당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면, 이것 역시 현재 상황의 시급성을 간과한 주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여야가 손을 맞잡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정치란, 갈등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주된 임무로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협조할 것은 협조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장기적 미래 비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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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율 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