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엔딩노트’ 작성법을 코치하는 강좌가 속속 개설되고 있다. |
2011년 12월 31일. 도쿄에서 납치 및 살해 혐의로 17년간 경찰에 공개 수배됐던 한 남자가 자수했다. 히라타 마코토(46)는 1995년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을 일으킨 신흥종교 옴진리교 교단 간부다. 오랫동안 경찰의 추적을 성공적으로 따돌려 온 그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뭘까? 변호인 측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죽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어 자기 죄를 뉘우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주간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작년 3월에 있었던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일반인들도 히라타처럼 가치관이 아예 달라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갑작스런 자연재해로 인해 충격을 받고, 하루하루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신종 트렌드는 ‘엔딩 노트’를 사서 적는 것이다.
엔딩 노트란 죽기 전 남기는 유서와도 비슷한 것인데, 공증을 한 유언장 같은 법적 효력은 없으나 특별히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남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자신의 생애에서 즐거웠던 추억 또는 슬펐던 일을 써 내려간다. 아울러 앞으로 먹어보고 싶은 음식, 해보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여행지 등도 전부 기록한다. 죽기 전 해야 할 목록을 일컫는 ‘버킷리스트’와 비슷하다. 이미 열 군데가 넘는 출판사에서 비슷한 종류의 엔딩 노트를 출시했는데, 가격은 1400엔(약 2만 원)선이다.
엔딩 노트는 아플 때 치료나 의료 등에 관한 희망, 장례식 절차나 규모 혹은 묘지나 비문에 대한 바람, 예금 액수나 재산 및 상속에 관한 사항을 간단하게나마 적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을 때 연명 장치를 계속할지 말지, 장례식에 부르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 리스트 등을 분류해서 써둔다. 즉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주변 이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필요한 일들을 미리 적어둬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다. 또 살면서 한번쯤 인생을 정리해서 주위와의 관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깨닫는 지혜를 갖춰 남은 시간을 뜻 깊게 보내자는 것도 엔딩 노트를 쓰는 목적이다.
엔딩 노트를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강좌도 여기저기서 신설됐다. 지역 문화센터나 복지센터, 시민단체에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상속 절차 이행 등을 돕는 민간회사나 장의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1시간 수업료가 800엔(약 1만 2000원)~1000엔(약 1만 4000원)으로 저렴하다. 강의가 끝나면 개별상담도 따로 해준다. 수강자는 70~80대 노인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요즘에는 50대가 강의를 들은 후 노부모에게 엔딩 노트를 쓰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영화 <엔딩 노트>의 한 장면과 홍보 팸플릿. |
그런가하면 나이든 노인들이 편안한 국내 온천 여행지에서 숙박을 하며 여행 중에 유서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꼼꼼하고 정성스레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단체여행상품인 ‘유서투어’, ‘유언투어’도 화제다. 여유롭게 시간을 갖고 생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10~20명이 1박 2일 혹은 2박 3일 투어를 간다. 여행사나 출판사 등에서 앞 다투어 기획 상품을 내놓고 있다. 가격은 2박 3일에 10만 엔(약 140만 원)대로 다소 비싸나 세무사, 법무사, 작가, 심리상담사 등 전문가가 동행하는 게 특징이다. 개별적으로 유서 내용의 법률적인 면을 검토해주거나 편지 문장을 다듬어주고, 심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돌봐 준다. 사진사도 동행해 숙박지에 조촐하게 스튜디오를 꾸며놓고, 영정 사진을 찍기도 한다.
또 죽은 이의 집에 찾아가 유품을 정리해주는 이색 직업 유품정리사도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해주는 가치 있는 직업’이라며 인기를 얻고 있다. 유품정리사는 아직 공인 자격증 아닌 민간 자격증이다. 하지만 정년 후 제2의 직업을 찾으려는 60대 중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하는 이들이 차츰 늘어나는 추세다.
유품정리사는 고인이 남긴 유품 중 쓰레기와 추억이 담겨 있는 물건을 구분하는 일을 한다. 고인이 생전에 애착을 갖고 모아놓은 수집품 등은 버리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나눠주거나 인터넷에 내놓아 팔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가 바닷가에서 수십 년간 수집해 온 조개를 남기고 죽었다면, 가족에게 하나씩 선물해 주거나 경매사이트에서 판 다음 일정한 수수료를 떼고 수익을 건네준다. 유품정리사에게 일을 맡기면 고인의 집이나 방을 청소한 후 나온 최종 쓰레기양에 따라 요금을 산정하는데, 기본비용이 2만 엔(약 28만 원) 정도다.
일각에서는 이런 엔딩 붐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두워진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심리학자들은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강하게 의식하면 앞으로 남은 생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편 기존의 자기계발서 대신 심리학 입문서나 정신건강 등을 다룬 서적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양상이다. 지진 피해가 컸던 일본의 동북지역의 서점에서는 피해주민이 와서 한 번에 10~20권씩 종교 관련 책만 구입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또 민간신앙에 대한 흥미도 커졌다.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액운을 쫓고 행운을 불러다준다고 믿는 순무를 지진 피해지역으로 보내는 색다른 시민운동을 하고 있다. 실의에 빠진 주민들이 2월에 싹을 틔워 노란 무꽃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