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뼈저린 경험, 33년간 사기 범죄 집중…‘민·형사 통합 차용증’으로 증거 남기기 확산돼야”
임채원 서울동부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장의 말이다. 최근 ‘유퀴즈(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사기꾼 잡는 검사’로 화제가 된 임 단장은 오는 12월 퇴직을 앞두고 있다. 임 단장은 33년 경력의 대부분을 형사부에서 보냈고, 최근 7년은 중요경제범죄조사단에서 근무하며 사기와 횡령 등 민생범죄에 집중해왔다.
‘탑건’ 속 매버릭은 전투기 조종사로 남기 위해 대령에서 더는 진급을 원하지 않는다. 임 단장도 일선에서 민생 경제범죄 수사에 전력하면서 진급과 거리가 멀어졌다. 그는 33년 경력을 마무리하면서 “사기 등 피해를 본 뒤에는 회복이 너무 어렵다.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면서 앞으로는 범죄를 줄이기 위해 우리가 거래를 하면서 ‘민·형사 통합 차용증’을 작성하는 것과 같은 ‘증거 남기기 운동’ 등 법률 문화 정착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은 임 단장과 다양한 사기 사건에 관한 얘기를 나눠봤다. 다음은 임 단장과의 일문일답.
―현재 근무하는 중요경제범죄조사단에 관해 설명해 달라.
“경제범죄가 늘어나고 사건 난이도가 복잡해져, 이런 범죄만 따로 수사하는 부처 필요성이 생겼다. 2014년 중요경제범죄조사단을 만들어 부장검사 이상 베테랑이 모여 복잡한 경제사건을 집중적으로 수사하게 했다. 한없이 복잡해 보이지만 베테랑이 보면 쉽게 풀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이런 사건을 중요경제범죄조사단으로 배당한다. 최근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발령이 좌천성 인사라고 보도되고 있는 건 불만이다. 업무가 많고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다 보니 빛나진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33년을 형사부, 그중에서도 사기 범죄에 집중해 왔다. 이유가 있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 한 채 값의 돈을 사기 당하면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졌다.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어머니도 남들이 다 꺼리는 악취 나는 재건대에서 일하면서 폐가 망가졌다. 사기 사건이 한 가정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사기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 실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많다.”
―과거 사건 중 인상 깊은 사건이 있다면 뭔가.
“처리했던 사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일일이 머릿속에 담아둘 수 없었고, 정신없이 일만 해오다 보니 소회를 따로 기록도 못 했다. 다만 정말 일이 힘들 때였던 2001년 남대문시장 내 상가 분양을 빙자해 15억 원을 사기 친 복잡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해자 한 분이 ‘밤에 자다가 하늘에서 굵은 동아줄이 내려오는 꿈을 꿨다’면서 사건을 면밀히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고생 끝에 결국 사기꾼 2명을 구속기소했고, 얼마 후 찾아온 피해자는 ‘제가 평생 검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가 정년까지 수사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기도발 덕분인 것 같다.”
―최근 가정파괴 범죄로 전세 사기가 늘어나고 있다. 피해자는 명의대여자뿐만 아니라 총책에 대한 수사도 강화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최근 말 그대로 전세 사기와의 전쟁 중이다. 총책 수사도 열심히 하고 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다. 다만 총책은 사기를 기획하면서부터 자기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처벌이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전세 사기는 부동산중개인, 명의대여자, 컨설팅 총책 등 범죄단체처럼 구성돼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이들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개그 소재로 쓰일 만큼 많이 언급되고, 끊임없이 공익캠페인도 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보이스피싱으로 당한 1인 최고 피해금액이 경신됐다. 종전 1명이 약 26억 원 피해를 보았던 사건에서 2022년 7월 의사 A 씨가 41억 원을 휴대폰 번호로 걸려온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뜯긴 사건이 있었다. 보이스피싱 일당은 사람을 홀리는 화술이 탁월하기 때문에 한 번 걸려들면 최면에 걸린 듯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검찰 등 수사기관은 그 기관의 유선전화로 전화하지 결코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지 않는다. A 씨는 그것을 몰랐고, 조사를 빙자해 보낸 앱(악성)을 무심코 휴대폰에 까는 바람에 당했다. 악성앱이 깔리는 순간 그 휴대폰은 좀비폰이 됐고, A 씨가 외부에 걸거나 걸려오는 전화는 중간에서 범인들이 가로챘다. 한편 범인들이 보내온 문서가 검찰 공식 문서인지 확인해볼 수 있는 ‘찐센터’로 연락해 문서가 진짜인지 확인해보면 된다.”
―최근 가상자산(코인) 사기가 크게 늘고 있다. 아직 규제가 없어 무법지대라는 말도 나온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국제 형사사법공조를 열심히 하면서 총책을 잡아내면서 2022년 1월부터 8월까지 피해금액이 4088억 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약 30% 정도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 한편 가상자산 범죄는 보이스피싱보다 피해 금액이 3배 이상 많다. 아직 가상자산 처벌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규제 공백이 있어 보인다. 똑같은 시세조종을 해도 주식으로 하면 처벌되고 코인으로 하면 처벌이 어렵다. 가상자산의 경우 착오 송금된 돈을 보관하던 사람이 이를 써버려도 형사처벌이 어렵다. 이런 빈틈도 법 개정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속 관련 사건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다. 사이비 무속인에게 사기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연말, 연초 새해 운세를 보기 위해 역술인이나 무속인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만큼 사기 사건도 많아 유튜브 채널인 ‘대성TV’를 통해 시리즈로 방송한 적이 있다. 법원은 무속인 사기사건에서 일종의 ‘종교적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2억 굿을 하면 공황장애를 낫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약속한 게 달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사기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판례를 보면 법원은 ‘무속은 그 실행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결과의 달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위안 또는 평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사기가 적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속행위를 의뢰하는 계약을 하는 경우에는 무속인의 약속을 계약서에 확실히 못 박아두거나 녹음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확보해 두는 것이 좋다.”
―흔히 ‘한국은 사기공화국이다’라는 말이 많다. 실제로 그런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범죄 가운데 1위가 사기다. 그와 같이 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사기가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20년에 발표한 ‘2018년 전국 범죄피해조사’에 의하면, 사기피해를 본 사람 중에서 범죄사실을 신고(고소)한 사람은 25.8%에 불과하다. 대부분 증거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민사사건이라는 이유 등으로 신고를 하지 않은 탓이다. 고소된 건 중에서도 기소율은 20%가 조금 안 된다. 기소가 안 되는 이유도 대부분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소가 됐다고 해도 선고형량이 외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2018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같은 해 발생한 똑같은 취업 사기로 베트남에서 피해액 8억 원이 발생한 사건과 한국에서 4억 원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무기징역이 나왔고 한국에서는 징역 3년이 선고됐다. 징역 3년 정도면 피해자와 합의 없이 소위 ‘몸빵’(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옴)하고 나와서 숨겨둔 피해자 돈으로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사기공화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사기당하지 않고 사는 법’이라는 강연을 약 70회 했다고 들었다. 사기당하지 않는 왕도는 무엇인가.
“사기꾼이 두려워하는 건 형사처벌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기죄로 고소된 사건의 10건 중에서 2건만 기소되고, 그 형량도 외국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다. 사기 사건에서 사기꾼이 속였다는 사실을 고소인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그 당시 사기꾼의 말을 믿은 나머지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사기꾼이 차용증이나 공증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사기친 돈은 차명으로 해 두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소송을 걸어와도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우리가 종래에 주고 받았던 차용증은 ‘원금, 이자, 변제기’ 즉 민사소송을 하기 위한 자료 수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속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해 고소사건의 80%가 불기소처분이 됐다.”
“형법상 사기죄는 ‘기망(속임)에 의한 (재산의) 처분행위’가 있으면 인정된다. 즉, ‘(사기꾼의) 속인 증거와 (피해자의) 처분행위에 대한 증거’를 문서에 담으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사기꾼이 ‘마스크 만드는 기계를 살 수 있도록 1억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피해자는, 먼저 차용증에 ‘기계구입 용도로 1억 원을 빌린다’라는 문구를 넣어달라고 하고(기망 내용), 이후 1억 원을 계좌로 입금하면 된다. 실제 사건에서 그 사기꾼은 1억 원으로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한 뒤 사업자금으로 빌렸을 뿐이라고 거짓말하면서 혐의를 부인했으나 피해자는 1억 원으로 빚을 갚을 줄 미리 알았다면 돈을 빌려주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통장거래내역서에 의해 기계를 산 것이 아니라 빚을 갚은 사실이 인정돼 사기죄로 기소했다.”
“이와 같이 이제부터는 차용증에 ‘피해자가 금전 등 처분행위를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된 상대방(사기꾼)의 말’을 담는다면 사기사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것을 ‘민·형사 통합 차용증(또는 계약서)’라고 이름 지었다.”
―퇴직이 멀지 않았다. 아쉬움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동안 사기꾼을 처벌하는데 매진했지만 예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사기당한 뒤 피해 회복 금액은 평균 약 3%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은 구두계약 문화가 일반화돼 있어서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나를 못 믿냐’고 사기꾼이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낸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거 신용카드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이 있었다. 민·형사 통합 차용증처럼 앞으로 한국 사회에 ‘증거 남기기’ 운동을 하고 싶다. ‘증거 남기기’ 문화만 정착되면 사기 범죄가 지금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오히려 몇 년, 몇십 년 후 ‘증거 없이 계약하던 문화가 있었나’ 하고 놀라움을 느낄 만큼 법률 문화를 바꾸는 것이 꿈이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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