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어머니들이 짜고 엮은 무명, 춥고 가난한 날들을 감싸다
무명이란 무명실(솜을 자아 만든 실)로 짠 천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 무명옷이 널리 보급된 데에는 고려 말 문신 문익점의 공이 컸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하던 길에 목화씨를 국내에 들여와 재배, 전파하고 목화솜으로 천을 짜는 방법까지 알리는 등 가히 혁명적인 공헌을 했다.
“백성 상하가 모두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는 ‘태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에 이미 목화의 재배와 무명의 직조가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수원은 사회개혁안을 적은 책 ‘우서’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주로) 삼베로 옷을 지어 입었는데, 문익점이 목면의 씨를 얻어온 뒤에야 비로소 살갗이 어는 우환을 면하게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기온이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면 작물의 특성상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부 등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목화가 재배되었다. 또한 나주와 진주 등이 질 좋은 무명의 산지로 유명했다.
조선 전기부터 무명은 쌀과 함께 화폐 구실을 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면직 산업이 발달하면서 무명 직물이 주요 교역품으로 떠올랐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수천 필의 면포(무명실로 짠 천)가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백목(하얗게 표백한 무명), 생목(나비가 넓고 발이 곱게 짠 무명), 세목(올이 가늘고 고운 무명) 등 다양한 면포가 중국에 보내는 예물로 쓰였다. 조선시대에 육의전 중 하나로 면포점을 두어 면포를 전담 판매하도록 한 것도 의복의 재료로서 무명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무명옷은 점차 대다수 사람들이 입는 ‘국민 의류’로 애용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무명이 옷을 비롯해 이불이나 생활용구의 주요 재료로 쓰였다. 당시 무명을 짜는 일은 주로 농가에서 길쌈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명의 제작 과정은 목화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후 목화솜에서 씨를 빼내고(전통 용어로 ‘씨앗기’) 솜을 부풀려(‘솜타기’) 고치(솜을 가늘고 길게 만 것)를 말고(‘고치말기’) 물레에 돌려 무명실을 만들어낸다. 자아낸 무명실을 날틀에 걸어 실의 굵기에 따라 길게 늘이고, 그 위에 풀을 먹인 후 베틀에 걸어 짜면 무명 한 필이 완성된다.
전통 방식으로 무명을 짜는 일은 부녀자들에게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목화씨를 빼서 활로 타고 고치를 말아 물레로 자아서 천을 짤 때까지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린다. 자신이 들이는 수고에 비해 대가가 너무 적었지만 그럼에도 부녀자들은 가족을 위해 물레질을 멈추지 않았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길쌈’(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묘사된 ‘열심히 실을 뽑아내는, 땀에 젖은 아낙네의 모습’에서도 그 수고로움과 애환을 엿볼 수 있다.
무명은 섬유의 특성이 자연스럽고 검박하여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하 구별 없이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입은 옷감이었다. 춘하추동 어느 계절에나 사용할 수 있고 빨래하기도 손쉬워 의복의 재료로서 그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개화기에 접어든 이후 전통적인 무명 길쌈은 수입 직물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제품들에 밀려 점차 쇠퇴하게 된다. 특히 해방 이후 질기고 다루기가 편한 나일론 직물이 나오면서부터 재래식 방법에 의한 무명 길쌈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1960년대 중반쯤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정부가 나주의 샛골나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호에 나선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어렵사리 샛골나이의 명맥을 홀로 이어오던 김만애 선생이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이후에는 그의 며느리인 노진남 선생이 전통 기능을 계승했다. 두 사람이 타계한 뒤에는 전승교육사인 김홍남 선생이 잠시 ‘명예 기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그마저 지난해 별세하면서 현재 기능보유자는 공석인 상태다.
무명짜기의 전통이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 속사정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품에 비해 삯이 너무 적어 생계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 노진남 선생도 생전에 그런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한때 뭇 가정의 어머니에게서 딸과 며느리에게로 전해지던 무명 길쌈은 이제 추억의 한 편으로 저물어가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정과 땀, 그리고 애환과 지혜가 대물림되어 깃든 무명의 가치를 어찌 경제논리로만 재단할 수 있으랴. 전통의 무명짜기를 다시 현실 속으로, 그리고 우리 곁으로 소환할 수 있는 뜻깊은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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