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문서로 대출 받고 호텔비·지인 돈 떼먹고 ‘대담’…4년 복역 출소 후 추방 명령 거부해 현재 가택연금중
뉴욕 검찰에 따르면, 소로킨이 4년 동안 벌인 사기 행각에 따른 피해액은 27만 5000달러(약 4억 원)에 달한다. 그의 수법은 비교적 단순했다. 아니, 오히려 대범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5성급 호텔에서는 공짜로 숙박을 하다가 쫓겨났으며, 고급 레스토랑이나 술집에서는 동행인들에게 지갑을 두고 왔다거나 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나중에 송금해 줄 테니 우선 좀 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소로킨이 억만장자 상속녀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피해를 입고 말았다.
사실 소로킨의 본모습은 억만장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뉴욕에서 ‘애나 델비’라는 가명을 사용했던 소로킨은 사실은 모스크바 외곽의 지극히 평범한 가정 출신이었다. 소로킨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으며, 어머니는 한때 작은 편의점을 운영했던 가정주부였다.
16세였던 2007년, 부모를 따라 독일로 이주한 소로킨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분야인 패션과 관련된 학위를 따기 위해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센트럴 세인트마틴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독일로 돌아온 소로킨은 2012년, 파리로 건너가 패션잡지 ‘퍼플’에서 월 400유로(약 55만 원)를 받고 인턴으로 일했다. ‘애나 델비’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소로킨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은 이듬해 뉴욕 패션위크로 출장을 가면서였다. 뉴욕의 화려함에 홀딱 반한 소로킨은 결국 뉴욕에 남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뉴욕 상류사회에 끼고 싶다는 열망이 소로킨의 허영심을 부추겼다.
‘퍼플’ 잡지사를 그만둔 소로킨은 부친을 태양광 사업가라고 소개하고 다니면서 6000만 달러(약 850억 원)를 물려받은 부유한 상속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상류층 파티에 드나들면서 인맥을 넓혀 나간 소로킨은 배우 맥컬리 컬킨과 펀드매니저인 마틴 슈크렐리 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만난 지인들 소개로 대형 금융기관과 접촉할 수 있었던 소로킨은 곧 문서를 위조해 은행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2016년, 2200만 달러(약 310억 원)를 대출받기 위해 시티내셔널 은행에 위조한 은행 거래 내역서 및 재정 문서를 제출한 그는 스위스은행 계좌에 6000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만, 신탁에 보관돼 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티내셔널 측은 이를 거부했고, 차선책으로 소로킨은 사모펀드(PEF)인 포트리스 인베스트먼트에 대출 신청을 했다. 다만 포트리스는 조건을 내걸었다. 소로킨이 대출 신청 절차와 관련된 법률 비용으로 10만 달러(약 1억 5000만 원)를 선납한다면 대출 신청을 검토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로킨은 다시 시티내셔널을 설득해 신속하게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초단기신용인 당좌대월 계약을 맺었다. 금액은 10만 달러였다. 이때도 소로킨은 위조문서를 제공하는 식으로 은행을 감쪽같이 속였다. ‘피터 헤네케’라는 가상의 사업 매니저를 만들어 가짜 AOL 이메일 주소를 제공했던 것. 훗날 재판에서 검찰은 소로킨이 구글에 ‘추적할 수 없는 가짜 이메일 주소 만들기’를 검색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포트리스 측에 10만 달러를 송금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포트리스 측은 서류상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스위스에 있는 담당 은행원들을 직접 만나 자산을 확인하겠다고 요구했다. 위기를 느낀 소로킨은 더 이상의 조사를 막기 위해 대출 신청을 철회했다.
포트리스 측은 실사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고 남은 5만 5000달러(약 7800만 원)를 소로킨에 다시 돌려주었고, 이 돈은 고스란히 소로킨의 유흥비로 탕진됐다. 소로킨은 명품 의류, 전자제품, 개인 트레이너 고용 등에 이 돈을 펑펑 썼다. 머리 염색을 하는 데 800달러(약 110만 원), 속눈썹 연장 시술을 받는 데 400달러(약 57만 원)를 쓰기도 했다.
당시 파티에서 소로킨을 만나 친분을 텄던 아트 콜렉터인 마이클 쉬푸 황은 자신이 겪었던 황당한 일을 털어 놓았다. 황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로킨은 “내가 동행해도 되냐”고 물었고, 이에 황은 흔쾌히 승낙했다. 소로킨을 위해 일단 항공편과 호텔방을 예약한 황은 “당연히 나중에 갚을 줄 알았다”며 황당해했다. 황이 대납한 비용은 2000~3000달러(약 280만~430만 원)가량이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소로킨은 이를 까맣게 잊은 듯 굴었고 돌아온 후에도 돈을 갚지 않았다. 황은 소로킨이 단순히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후 소로킨은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아트 바젤에 참석하면서도 동일한 행동을 보였으며, 이듬해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생일 파티를 열기 위해 홍보회사를 고용한 후에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곤란에 처했다. 당시 파티에 참석했던 황은 소로킨이 이상하게도 항상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사실, 그리고 아파트가 아닌 호텔에서 생활하는 점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이에 곧 SNS 팔로우를 끊고 연락을 차단해 버렸다.
나이트클럽에서 소로킨을 알게 된 레이첼 윌리엄스 역시 피해자였다. 당시 ‘배니티페어’ 편집자였던 윌리엄스는 소로킨과 꽤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소로킨을 “종업원들에게 까다롭게 굴고, 무례했다”고 묘사하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다른 사람들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타곤 했다”고 기억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소로킨이 일정한 거처 없이 맨해튼 소호에 있는 하워드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호텔의 숙박비는 1박에 400달러(약 57만 원)였다. 이곳에서도 소로킨은 통 큰 억만장자 행세를 했다. 친구가 된 컨시어지 담당 직원과 레스토랑을 추천해주거나 방으로 소포를 가져오는 등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는 직원들에게 100달러(약 14만 원)씩 팁을 주곤 했다. 직원들은 그럼에도 소로킨이 무례하고 계급주의적 차별의식에 절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텔 내에서 레깅스나 목욕 가운을 입은 채 편안한 차림으로 활보한 소로킨은 종종 호텔 내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인 ‘르 쿠쿠’에서 식사를 했다. 얼마나 자주 갔는지 심지어 주방장과도 친구가 됐을 정도다. 하지만 이때도 비용은 지불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방에 달아놓는 식으로 외상을 했다. 마사지, 매니큐어, 개인 트레이닝 비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로킨이 신용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호텔 측은 그를 의심했고, 이에 3만 달러(약 4300만 원) 상당의 청구서를 결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있는 돈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된 소로킨은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문서를 위조한 그는 이번에는 씨티은행 계좌에 16만 달러(약 2억 3000만 원) 상당의 가짜 수표를 예치한 후, 이 중 7만 달러(약 1억 원)의 가용자금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호텔 측에 외상값 3만 달러를 송금했다.
그 후 소로킨의 사기 행각은 더욱 대범해졌다. 워런 버핏과의 만남을 목표로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항공 모빌리티 기업인 ‘블레이드’를 통해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가는 왕복 전세기를 예약했다. 이때도 역시 위조된 송금 증명서를 사용했다. 도이체방크에서 3만 5390달러(약 5000만 원)가 송금된 확인서를 위조해 제출한 후 유유히 전세기를 타고 날아간 것이다. 소로킨은 전세기 예약을 위해 ‘블레이드’의 CEO인 로버트 비젠탈을 직접 만났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비젠탈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 비젠탈은 결국 소로킨이 대금을 지불하지 않자 그를 경찰에 신고했다.
소로킨의 사기 행각이 들통난 결정적인 계기는 모로코 여행이었다. “내가 여행 경비를 모두 대겠다”며 윌리엄스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소로킨은 보란듯이 마라케시에 있는 5성급 호텔인 ‘라마모우니아’를 예약했다. 이곳은 1박에 7000달러(약 1000만 원) 하는 침실 세 개, 개인 수영장, 전용 집사가 있는 최고급 숙박시설이었다.
며칠 후 호텔 측은 소로킨의 신용카드가 결제가 안 된다면서 대체 결제 방식을 요구했고, 이에 소로킨은 늘 그랬듯이 “카드 번호를 잘못 입력한 게 아니냐” “시스템이 다운된 것 아니냐”면서 오히려 당당하게 굴었다. 그러면서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윌리엄스에게 6만 2000달러(약 8800만 원)를 대납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는 곧 은행으로 송금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연봉보다 더 높은 금액이었지만, 윌리엄스는 이 말을 굳게 믿고 대신 결제를 해주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모로코행 항공편, 소로킨이 여행지에서 구입한 물품, 개인 투어 비용까지 전부 신용카드로 지불해 주었다. 그때마다 소로킨은 돈을 곧 보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하지만 윌리엄스가 돌려받은 돈은 5000달러(약 700만 원)에 불과했다. “결국 집세를 내기 위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며 분개한 윌리엄스는 나중에 소로킨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모두 소로킨 부모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에 윌리엄스는 소로킨이 사기를 치고 있다고 확신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도 호텔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쫓겨나길 반복하면서 이 호텔 저 호텔을 떠돌던 소로킨은 호텔 측으로부터 서비스 절도 혐의로 고소를 당했고, 결국 노숙자 신세가 됐다. 르 파커 메르디앙 호텔의 레스토랑에서는 저녁을 먹고 도주하려다 경찰에 체포됐고, 이때도 “내가 전화만 하면 5분 안에 달려와서 돈을 내줄 친구가 있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직접 찾아가 울면서 도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결국 2017년 10월, 사기 행각이 전부 들통나 체포된 소로킨은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는 소로킨은 항상 빚을 갚기 위해 노력했으며, 인스타그램으로 광고비를 받으면서 일도 하고 있다고 변호했다. 하지만 절도, 사기 등 8가지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은 소로킨은 4~12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여기에 더해 2만 4000달러(약 34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졌으며, 시티내셔널에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 시티은행에 7만 달러(약 1억 원), ‘블레이드’에 지불한 금액의 약 3분의 2를 포함해 총 19만 9000달러(약 3억 원)를 배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재 가택연금 중인 소로킨은 사뭇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너무 많다. 예술도 이 가운데 하나”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또한 “아직 구체적인 형태는 잡히지 않았지만, 각 에피소드마다 다른 게스트를 초대하는 팟캐스트 방송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책도 구상하고 있다. 여성들의 투쟁에 관심을 모으기 위해 사법제도 개혁 등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한편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로 소로킨이 받은 판권료는 32만 달러(약 4억 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돈은 벌금, 은행 배상금, 변호사 비용 등으로 처리돼 소로킨 개인에게 돌아간 몫은 거의 없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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