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계획해 친일파에 복수하는 80대 노인으로 열연…“굽은 자세 연기하다 목 디스크 앓기도”
극 중 그의 캐릭터가 복수를 이루기까지 장장 60여 년, 그리고 이 영화가 대중들 앞에 공개되기까지도 꼬박 2년이 걸렸다. 2021년 개봉을 앞두고 코로나19로 인해 연기해야 했던 영화 '리멤버'를 두고 배우 이성민(54)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언론배급시사회와 독립기념관에서 진행한 특별 시사회에서 호평을 듣긴 했지만, 역사 앞에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이 '힙하다'고 여기는 일부 대중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기대보단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성민은 그런 지점에 있어서 함께 합을 맞춘 남주혁이 제 몫을 잘해주었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제가 연기한 필주는 수십 년 전, 그 시대에 살면서 온 가족을 잃어버린 인물이죠. 그 점이 현대 관객들에게 어떻게 공감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지점에서는 남주혁 군이 맡은 인규가 중요한 역할을 해요. 필주의 여정에 인규가 동참하고, 때론 끌려가고, 때론 필주를 이해하는 그런 과정이 어쩌면 지금 현대 젊은 관객들의 눈높이가 아닐까 싶죠. 젊은 친구들이 가진 평균치의 감정, 생각 이런 것을 하는 인물이 바로 인규인 것 같아요. 그런 지점을 또 (남)주혁 군이 정말 잘 연기해줬고요. 굉장히 키가 크고, 잘생긴 배우가 그런 평범함을 연기해 줬다는 게(웃음).”
영화 '리멤버'는 뇌종양 말기의 80대 알츠하이머 환자인 필주가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가족을 죽게 만든 친일파들에게 60여 년을 계획해 온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패밀리 레스토랑 최고령 아르바이트생 '프레디'로 젊은이들에게 뒤지지 않는 '인싸'의 삶을 살던 일상의 가면을 벗어던진 필주는 복수자이자 처형인으로서 원수들을 하나씩 자신만의 방법으로 처단해나간다. 그런 필주를 연기하기 위해 원래 나이보다 30살 이상 많은 모습으로 분장해야 했던 이성민은 “액션보다 더 부담스러웠던 부분이 노인 연기”였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외모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선배님들 선생님들과 연기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힘들었죠(웃음). 연기라는 게 노트에 적어가면서 공식처럼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그냥 짬짬이 생각날 때마다 그냥 저 스스로 연기 테스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됐던 것 같아요. 목소리도 의도적으로 내 목을 눌러서 만드는 것도 있었고 자세도 그랬는데 그때 목 디스크가 오기도 했죠(웃음). 그런데 80대 얼굴을 한 저를 보니 신기했어요. 거울을 보니 내 아버지하고 닮았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노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 필주는 패밀리 레스토랑 TGIF에서 젊은 아르바이트생들과도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싸 알바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손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화려한 탬버린 안무를 보여준다거나 Z세대들이 사용하는 신조어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식이다. 젊은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을 연기한 덕에 이성민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20대인 딸 못지않게 신조어를 잘 챙겨 배웠다고 말했다.
“탬버린 신은 집에서 짤랑짤랑거리고 연습하다가 시끄럽다고 야단을 많이 맞아서 소리 안 나게 그 짤랑거리는 부분을 고정해서 연습했어요(웃음). 또 'JMT'(존맛탱·맛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신조어)란 대사는 원래 '존맛탱'이라고만 써져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딸이 그걸 보고 자기들은 'JMT'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대사를 제가 수정해서 넣게 됐던 기억이 나요. 사실 저는 요즘 애들 말에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예전에 영화 '공작' 홍보 영상을 찍을 때 처음 신조어 테스트를 받았을 때도 다들 '멘붕'(멘탈 붕괴)이 와서 '이런 말을 쓴다고?' 그랬는데(웃음). 그 후로 홍보 때마다 자꾸 신조어 테스트를 시켜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주혁이도 저런 거 잘 모르더라고요(웃음).”
남주혁이 연기한 인규는 이성민의 말대로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그런 그는 필주의 복수 계획에 의도치 않게 동참하게 되면서 과거의 청산과 미래의 지향점을 고민하며 작품을 바라보는 젊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어딜 보나 눈에 띄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복수 대상들을 찾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완전 범죄'의 고정관념과는 다소 동떨어진 모습이긴 하나 이성민은 이 역시 영화의 중요한 장치임과 동시에 필주와 인규를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필주의 계획에서 빨간 스포츠카를 선택한다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죠. 어쩌면 그 차는 필주가 인규에게 (계획 실행을 도와줄 것을) 부탁할 때, 인규가 평소에 늘 자기가 타고 싶었던 차를 얘기했던 것이 기억나서 그걸 선물해준 게 아닌가 싶어요. 왜 하필 흔한 차가 아니라 그 차를 선택했는지, 그건 필주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상징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기억이 빨리 사라지고 있고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이 일을 끝내야 하는 처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장치라고 생각해요.”
'리멤버'에서 남주혁과의 버디(단짝) 케미스트리로 호평을 받은 이성민은 명실공히 '브로맨스 장인'으로 불릴 만하다. 앞서 드라마 '미생'(2014)의 임시완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영화 '기적'(2021)의 박정민과 '제8일의 밤'(2021)의 남다름, 그리고 오는 11월 18일 방송될 기대작 '재벌집 막내아들'의 송중기까지 특히 젊은 남자 배우들과 좋은 합을 보여준 데서 나온 애칭이다. 배우 본인은 “로맨스가 들어와야 되는데 브로맨스만 들어온다”며 살짝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만큼 젊은 배우들이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선배로서 잘 받쳐준다는 방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해 이성민은 “서로 가지고 있는 100%를 다 내보일 수 있도록 벽을 없애는 게 그런 앙상블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제가 어릴 때는 선배가 해야 될 게 있고 후배가 해야 될 게 있었어요. 또 연기할 때 무대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부터 가르쳐주셨죠. 등장은 어떻게 해야 하며, 관객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런데 나이 들어서 돌아보니까 그런 것들이 굉장히 쓸데없더라고요. 저도 나이 먹은 뒤에 연기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선생님 말씀은 '하고 싶은 대로 해' 였어요. 그게 맞다고 생각해요. 내가 상대하는 배우가 나보다 어리든 나이가 많든 배우가 하고 싶은 대로, 충동대로 해야 좋은 장면이 나와요. 그러려면 서로의 벽이 없어야 하니까 저 역시 후배들과 연기할 때도 그런 태도로 연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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