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박영현 PS 최연소 세이브 기록…2008년 두산-삼성 PO에선 한 경기 투수 17명 투입 혈전
#안우진, 가을에도 '닥터 K'
안우진은 지난 16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준PO 1차전에 키움 선발 투수로 나서 6이닝 3피안타 9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최고 구속은 시속 157㎞까지 나왔고, 경기 내내 KT 타선을 압도했다.
안우진은 1회 초 KT 리드오프 배정대에게 좌전 안타를 맞았지만, 이후 9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범타 처리했다. 1회 황재균과 앤서니 알포드, 2회 강백호와 박경수, 3회 송민섭과 배정대가 삼진으로 돌아섰다. 두 번째 주자를 내보낸 건 4회 초 1사 후. 알포드의 타구가 3루수 송성문 쪽으로 향했는데, 타구 속도가 너무 빨라 그대로 외야까지 뚫고 나갔다. 그러나 안우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 타자 박병호와 장성우에게 잇따라 강속구를 던져 다시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5회 초 2사 후엔 심우준에게 유일한 볼넷을 허용했지만, KT 대타 김민혁을 좌익수 플라이로 잡고 한숨 돌렸다.
안우진은 6회 초에도 공 4개로 가볍게 투아웃을 잡았다. 다음 타자 알포드가 좌중간으로 안타를 친 뒤 2루까지 달리다 태그아웃되는 행운도 겹쳤다. 6회까지 투구 수는 88개. 7회 초에도 등판할 줄 알았지만, 키움 벤치는 투수 교체를 택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물집이 생긴 탓이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경기 후 "손가락 물집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안우진 본인은 7회에도 나가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선두 타자였던) 박병호 선배까지는 상대하고 내려오고 싶다'고 하더라"며 "현장에서도 힘들게 고민했다. 마지막 게임이었다면 그대로 안우진을 밀고 나갔을 텐데, 앞으로 더 많은 경기가 남지 않았나. 결국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우진은 올해 정규시즌 평균자책점(2.11)과 탈삼진(224개) 1위에 오른 리그 최고 투수다. 특히 탈삼진 부문에선 2위 드류 루친스키(NC 다이노스·194개)와 30개 차가 났다. 가을야구에서도 '닥터 K'의 위력은 여전했다. 정규시즌 KT전 평균자책점이 5.11로 좋지 않아 걱정을 샀지만, 진짜 중요한 무대에 오르자 괴물 같은 투구로 실력을 뽐냈다. 키움이 1차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벤자민, '키움 킬러'의 위용
준PO 1차전의 최고 투수가 안우진이었다면, 2차전의 영웅은 단연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은 지난 17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준PO 2차전에서 7이닝 5피안타 1볼넷 9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왼손 투수인 그는 이정후, 김혜성 등 왼손 타자가 주축을 이룬 키움 타선을 7회까지 완벽하게 제압했다.
1승을 먼저 내주고 시작한 KT 입장에선 이날 벤자민의 활약이 절실했다. 시즌 막판까지 3위 다툼을 벌인 데다, KIA 타이거즈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WC)까지 치러 불펜 투수들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이강철 KT 감독은 경기 전 "선발 투수가 많은 이닝을 던져줘야 한다"고 바랐는데, 벤자민이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예리한 슬라이더를 앞세워 키움 타자들의 헛스윙을 연달아 이끌어냈다. 벤자민이 7회 2사 1·2루에서 1차전 승리의 주역 송성문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고 임무를 마치자 KT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벤자민은 지난 6월 윌리엄 쿠에바스의 대체선수로 KT에 입단한 뒤 17경기에서 5승 4패,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했다. 시즌 전체 성적 자체도 나쁘지 않지만, 키움전 4경기에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0.78으로 유독 더 강했다. 이날도 KT 타선이 1회 초 박병호의 선제 결승 적시타 등으로 2점을 뽑자 추가 실점 없이 그 리드를 지켜냈다. 승장 이강철 감독과 패장 홍원기 감독 모두 이날의 승인과 패인으로 "벤자민의 공이 워낙 좋았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심지어 벤자민은 KIA와의 WC에서 불펜 등판을 마다하지 않고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뒤 사흘만 쉬고 이날 다시 선발로 나서는 '팀 퍼스트' 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KT의 가을야구 여정에 든든한 힘을 보탰다. 그는 경기 후 "MLB에서 불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선발이든 불펜이든 집중도를 잘 유지하면서 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컨디션이 굉장히 좋았다. 키움에 왼손 타자가 많아서 내 공에 믿음을 갖고 던질 수 있었던 게 호투 비결인 것 같다"며 기뻐했다.
#KT 신인 박영현의 첫 가을
KT는 2-0으로 승리한 준PO 2차전에서 선발 벤자민 외에 딱 한 명의 투수를 더 마운드에 올렸다. 올해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투수 박영현이다. 이강철 감독은 "훗날 KT의 마무리 투수가 꿈"이라던 2003년생 루키를 긴박한 포스트시즌 경기 후반에 깜짝 투입했다. 박영현은 남은 2이닝을 무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 기대에 부응했다. 또 19세 6일의 나이로 세이브를 올려 KBO리그 역대 포스트시즌 최연소 세이브 기록을 새로 썼다. 종전 기록은 두산 베어스 소속이던 임태훈이 남긴 19세 25일이었다.
박영현은 8회 말 첫 타자 김준완을 삼구삼진으로 처리하며 기세를 올린 뒤 베테랑 타자 이용규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올해 타격 5관왕인 이정후와의 대결에서는 직구 3개를 연이어 던져 유격수 땅볼을 유도하는 대담함도 뽐냈다. 박영현은 "KBO 최고의 타자라 삼진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인플레이 타구를 만든 뒤 수비를 믿겠다는 생각으로 승부했다"고 했다. 9회 말 1사 후엔 야시엘 푸이그에게 왼쪽 담장 바로 앞까지 날아가는 큼직한 타구를 허용했지만, KT 좌익수 홍현빈이 잡아내 한숨을 돌렸다. 결국 박영현 야구인생의 기념비적인 2이닝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는 경기 후 "8회를 마친 뒤 '내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 '더 던질 수 있냐'고 물으셔서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며 "이렇게 큰 경기에서 세이브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긴박한 순간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아드레날린이 나온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김광현과 안우진의 등장
실제로 매 경기가 '단두대 매치'인 포스트시즌에선 신인 투수의 깜짝 호투가 팀의 가장 큰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SSG 랜더스 에이스 김광현의 등장이 그랬다. 김광현은 SK(현 SSG) 소속으로 2007년 KBO리그에 데뷔했지만, 그가 본격적인 존재감을 알린 시기는 그해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2007년 10월 26일 열린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 시즌 3승 7패에 평균자책점 3.92를 기록한 고졸 신인 김광현이 SK의 4차전 깜짝 선발 투수로 나섰다.
상대 선발 투수는 1차전에서 역대 한국시리즈 최소투구 완봉승(99개)을 거둔 두산 에이스 다니엘 리오스였다. SK 타선은 지쳐 보이는 리오스를 상대로 1회 선취점을 올린 뒤 5회 조동화-김재현의 연속타자 홈런으로 3점을 먼저 냈다. 김광현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위해 그 정도 점수면 충분했다. 앳된 얼굴의 '히든 카드' 김광현은 공 하나마다 힘과 패기를 모두 실어 던졌다.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시속 150㎞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앞세워 두산 강타선을 틀어막았다. 6회 1사 후 이종욱에게 단 한 개의 안타를 내준 게 전부. 7과 3분의 1이닝 1피안타 9탈삼진 무실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한국시리즈 첫 승리를 따냈다. 그렇게 SK의 에이스가 태동했고, SK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안우진도 그랬다. 신인이던 2018년 한화 이글스와의 준PO에서 깜짝 호투로 2승을 따내면서 한 단계 도약했다. 안우진 역시 넥센(현 키움)의 1차 지명을 받고 큰 기대 속에 입단했지만, 첫 해 정규시즌 성적은 2승 4패 평균자책점 7.19로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야구가 시작되자 '수퍼 루키'의 진면목을 뽐내기 시작했다.
안우진은 그해 준PO 2차전에서 넥센이 3-4로 역전을 허용한 4회 말 2사 1루에서 마운드를 이어 받았다. 데뷔 후 첫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다. 이후 3과 3분의 1이닝 동안 공 51개를 던지면서 2피안타 무실점으로 한화 타선을 틀어 막았다. 넥센이 5회 임병욱의 3점 홈런으로 역전한 덕에 안우진은 승리 투수가 됐고, 역대 준PO 최연소 승리 투수(19세 1개월 20일) 기록을 경신했다. 고졸 신인이 포스트시즌 데뷔전에서 승리 투수가 된 건 역대 3번째였다. 넥센은 당시 선발과 불펜 투수 모두 부족하던 상황이라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우진은 사흘 뒤 열린 준PO 4차전에서도 5⅔이닝 5피안타 1볼넷 4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1로 맞선 4회 초 1사 1·3루 위기에서 마운드에 오른 그는 거침 없이 아웃카운트를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긴 했지만, 시속 150㎞가 넘는 강속구와 시속 140㎞짜리 슬라이더를 앞세워 위기를 넘겼다. 7회 1시 1·2루에서는 한화 중심 타자인 재러드 호잉과 김태균을 연속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기도 했다.
그사이 넥센은 결국 역전에 성공했고, 안우진은 경기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지켜 다시 승리 투수가 됐다. 준PO에서 넥센이 올린 3승 중 2승을 안우진이 뒷받침한 셈이다. 안우진은 "힘들지만 내게는 중요한 기회였다. 이런 큰 무대에 서니까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막상 마운드에 올라가면 신이 나고 전혀 힘들진 않다"고 당차게 말했다. 장정석 당시 넥센 감독은 "안우진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PS 최연소 승리 투수, 김명제
포스트시즌 역대 최연소 승리 기록은 19세도 아닌 18세 투수가 보유하고 있다. 두산 소속 선수였던 김명제다. 2005년 10월 10일 두산과 한화의 플레이오프 3차전. 두산이 내세운 깜짝 선발 카드는 고작 18세 9개월 5일이 된 고졸 신인 김명제였다.
한눈에도 앳된 얼굴의 유망주가 당대 최강의 외국인 원투 펀치였던 리오스와 맷 랜들에 이어 3선발의 중책을 맡았다. 당시 두산 사령탑이던 김경문 감독은 이 선수를 낙점해 놓고도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했다. 경기 전엔 "1회라도 흔들리면 바로 교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게 기대를 뛰어 넘었다. 김명제는 1회부터 과감한 몸쪽 승부를 펼쳤고, 위기는 삼진으로 벗어났다. 주자가 나가도 흔들리지 않았다. 계약금 6억 원을 받고 1차 지명으로 입단한 투수다웠다.
김명제는 결국 역사를 하나 썼다. 5이닝 4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역대 포스트시즌 최연소 승리 투수가 됐다. 이후 내로라하는 고졸 신인들이 포스트시즌 마운드에서 데뷔하고 승리를 챙겼지만,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마운드에서는 위풍당당해 보이던 김명제는 경기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긴장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했다"며 배시시 웃었다. 두산은 이 승리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안타깝게도 김명제는 그 후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다. 2009년 비시즌에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후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개척했다.
#투수가 많이 나와서 투수전
포스트시즌의 백미는 에이스들의 투수전이다. 하지만 모든 투수가 마운드로 쏟아져 나오는, 다른 의미의 '투수전'도 가을야구에서만 볼 수 있는 명장면 중 하나다. 두산과 삼성 라이온즈의 플레이오프가 그랬다.
두 팀은 KBO리그에 '왕조'를 구축했던 명문 구단이다. 올해 두 팀 다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는데, 동반 가을야구 탈락이 23년 만이라 도리어 화제가 됐을 정도다. 실제로 두 팀은 가을에 맞붙기만 하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혈전을 펼쳤다. 한 경기에서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투수 대부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정도다.
2008년 두 팀의 플레이오프 2차전은 연장 14회 승부가 펼쳐졌다. 이 경기에 투입된 두산과 삼성 투수의 숫자는 총 17명. 두산에서 9명, 삼성에서 8명이 나왔다. 역대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 출장 기록이다. 이날 양 팀 투수들이 맞닥뜨린 타자의 수도 117명에 이른다. 삼성 투수들이 52명, 두산 투수들이 65명을 각각 상대했다. 경기는 14회초에 3점을 뽑은 삼성이 7-4로 이겼다.
2010년에는 더 놀라웠다. 플레이오프 5경기가 모두 1점 차로 끝나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잠실구장에서 열린 3차전과 4차전이 백미였다. 3차전은 연장 11회 승부였다. 두산이 9명, 삼성이 7명의 투수를 냈다. 경기 시간이 5시간에 육박했는데, 투수 교체에 걸린 시간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 두산이 9-8로 끝내기 승리를 거뒀다. 다음 날인 4차전도 양 팀이 낸 투수 숫자가 전날과 같았다. 두산이 9명, 삼성이 7명. 결과는 반대로 8-7 삼성의 승리였다. 이틀 연속 양 팀 합쳐 16명씩의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고, 결과는 1승 1패였다. 야구팬들은 신이 났지만, 양 팀 감독과 투수 코치는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던 명승부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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