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열대의 나무들이 한때 찬란했던 문명을 뿌리삼고 잡아먹으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삶터가 된 기묘한 곳이 있었다. 오랜 시간 정글인 줄만 알았던 아름다운 문명이 있었다. 허물어진 것은 허물어진 대로, 남아있는 것은 남아있는 대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리고 심장이 반응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나는 크메르 제국의 영웅 자야 바르만 7세에게 반하여 앙코르톰을 돌아다녔다. 그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처럼 크메르의 영토를 넓혀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만든 왕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앙코르톰이라는 신성한 거대도시를 건설한 인물이다. 내가 그에게 매료된 것은 그가 일군 거대한 도시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도시를 일군 힘의 근원 속에 심장처럼 존재하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자야 바르만 7세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추억하는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공주였다. 그러나 자야 바르만 7세는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의 신분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평민이었던 것이다. 카스트 제도가 분명한 힌두교의 나라에서 평민을 사랑해서 평민과 사랑에 빠진 공주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짐작이 된다.
공주는 사랑에 빠져 아이를 잉태했으나 공주의 미래를 걱정하여 분노한 왕은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해버렸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는 이번엔 어머니와 헤어져 살아야 했다. 그렇게 고독한 운명을 살아낸 그가 앙코르로 돌아와 신성한 거대 도시 앙코르톰을 세우기까지 외적으로 내적으로 얼마나 많은 싸움을 해야 했을까?
앙코르톰을 세운 그는 통곡의 방을 지었다. 거기서 그는 종종 어머니가 그리워 심장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때로 눈물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적셔 본성의 꽃을 피우는 영생수다. 나는 생각한다. 저 통곡의 방이야말로 거대한 문명의 심장이라고.
실제로 통곡의 방에 들어가 심장을 치면 방이 공명하면서 갇혀있던 내 속의 이야기들이 결박을 풀고 있는 느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이야기, 자기가 태어난 원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미가 될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행이 필요한 것일까.
살다보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울어야 한다.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무디고 둔한 사람이다. 나는 믿는다. 울고 싶을 때 흐르는 눈물은 육감을 깨우는 신성한 것이라고.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