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3일 정부는 50조 원 규모의 긴급 유동성 공급대책을 내놨다. 20조 원 규모의 채권안정펀드를 투입하고 국책은행과 신용보증기금, 공기업 등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매입하거나 보증하는 한도를 30조 원까지 늘리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CP, 양도성예금증서(CD), 단기통화안정증권 등 3대 단기금리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의 이번 대책으로는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자금 수요를 채우기 어렵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금리 상승으로 경기가 빠르게 침체되면서 현금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의 자금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연말로 갈수록 법인들의 자금 수요는 증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올해 이미 채권에서 큰 손실을 본 투자기관들은 일찌감치 ‘집행종료(Book closing)’에 나서고 있다. 연내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는 약 14조 원, 내년 상반기에는 54조 원이 넘는다. 올 6월 말 현재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규모는 112조 원에 달한다. 지급보증까지 합하면 150조 원에 달한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 10월 18일부터 연말까지 증권사에 만기도래하는 유동화증권(ABSTB, ABCP) 발행 잔액만 27조 원이다.
채안펀드는 아직 자금모집도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돈을 내야 하는데, 경영진 입장에서 손실 위험이 큰 곳에 자금을 집행하기 어렵다. 국책은행과 공기업의 자금지원 기준도 모호하다. 증권금융과 산업은행 등이 CP와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지만 임시방편이다. 기초자산인 부동산 PF에 문제가 발생하면 부실화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금융권에서 자금시장 불안을 단숨에 잠재우기 위해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대유행을 시작하던 2020년 3월 한은은 우량 회사채를 담보로 대출을 실시했다. 특수목적기구(SPV)를 통한 저신용등급 회사채 직매입 방침도 밝혔다.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하면 담보로 인정하는 증권을 국채 외에도 공사채와 은행채 등으로 범위를 넓일 수도 있다. 담보 종류가 확대되면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그만큼 돈을 구하기 쉬워진다.
금융투자협회 산하 연구원이 모태인 자본시장연구원의 황세운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금융회사나 일반 기업의 파산 위험성이 급증한다면 조치는 즉각적이고 대규모로 집행될 필요가 있다”며 “신속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에 의한 재원 마련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담보 확대는 가능하지만 SPV를 통한 자금시장 직접 개입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2020년 한은이 자금시장에 개입한 것은 방역 봉쇄로 인한 일시적 충격에 대응하는 응급조치였다. 마침 금리를 내려 시장에 돈을 풀기 전이었다. 지금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이는 상황이다. 한은이 시장에 개입하면 기준금리 인상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발권력까지 동원한다면 우리 경제에 대한 대외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한은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은이 단기간에 자금시장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금융권과 연결된 부동산 프로젝트의 사업성에 대한 시장의 판단이 중요해진다. 사업성이 충분하다면 관련 대출의 만기연장이 원활하겠지만, 수익성이 의심스럽다면 자금회수가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물가와 금리가 오르면서 공사원가는 높아지고 완공 후 분양은 쉽지 않은 환경이 예상된다는 데 있다. 부실 판정을 받는 PF 사업장이 많다면 이번 자금시장 대란은 경제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 프로젝트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기가 수개월에 불과한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으로 공사대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 단기로 쓰면 금리가 낮은 데다, 빌려 주는 입장에서도 만기가 짧으면 수시로 상황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유동성이 풍부한 저금리 상황에서 부동산 PF ACBP가 급증했던 이유다. 그런데 금리가 오르고 부동산 시장이 냉각되면서 자금시장 상황이 급변했다. 짧은 만기가 자금 압박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ABCP를 발행한 PF 특수목적법인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프로젝트에 보증을 선 건설회사나 금융회사가 대신 갚아야 한다. 돈을 빌리거나 있는 자산을 팔아야 한다. 최근 국채 금리가 급등한 이유다. 자금이 다급해진 증권사들이 보유 중인 국채를 급히 내다팔면서 가격이 하락(금리 급등)했다. 국채를 가지고 있지 않는 건설사는 회사채를 발행하든지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연장이 안 될 정도의 자산가치를 가진 PF로 충분할 리 없다. 결국 부도 위험이 높아진다.
이번 사태로 건설사 줄도산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상대적으로 자금여력이 부족한 중소형 증권사가 부도날 가능성도 점쳐진다. 건설사 부도는 관련 금융회사들의 건전성을 해질 수 있다. 중소형이지만 증권회사가 무너지면 거래관계로 엮인 금융권 전반에 치명상이 될 수 있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은 미국 경제를 송두리째 흔든 ‘핵폭탄급’ 위력을 발휘했다. 국내에서 금융회사들이 부실화된 가장 최근 사례는 신용카드 대란 때다.
증권사, 쉬운 돈벌이가 오히려 독 됐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에 자금을 공급한 곳은 비은행 금융회사들이 많다. 증권사·여전사·저축은행·보험사 등이다. 만기가 짧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과 당장에는 자금이 불필요한 지급보증에는 증권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문제는 증권사들의 자금조달 구조다.
증권사는 환매조건부채권(RP), 기업어음(CP), 전자단기사채 등으로 주로 자금을 조달한다. 모두 만기가 짧다. 신용등급이 아주 높은 대형사 몇 곳을 제외하면 회사채로 자금을 조달하는 곳도 거의 없다. 대형사 몇 곳을 제외하면 증권사들은 신용도가 낮아 긴 만기로 돈을 빌리기 어렵다. 초단기로 돈을 빌리면 이자도 싸다. 이 때문에 1년 만기로 돈을 빌릴 때 석 달 만기로 4번 어음을 발행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ABCP의 만기도 짧으니 증권사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보증은 굳이 돈을 빌려주지 않고 도장만 찍어줘도 수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국내 26개 증권사의 부동산 익스포저(위험노출액)는 56조 5230억 원이다. 이 중 부동산 PF 익스포저는 PF대출 3조 1280억 원과 PF채무보증 24조 8620억 원 등 27조 9900억 원이다. 특히 자기자본 규모 상위 10대 증권사 채무보증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32조 8364억 원으로 2016년 말보다 79% 불어났다. 삼성증권이 15배로 불어났고 신한투자증권(914%), 하나증권(535%), 키움증권(229%), 대신증권(169%), 한국투자증권(80%), KB증권(43%)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10대 증권사는 지난해 증시와 부동산시장 호황에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한국투자증권 1조 4474억 원, 미래에셋증권 1조 1872억 원, NH투자증권 9315억 원, 삼성증권 9658억 원, 키움증권 9037억 원 등이다.
그런데 부동산 PF 수익성에 문제가 생기자 상황이 급변했다. 레고랜드 사태는 ABCP에 보증을 제공한 강원도가 의무이행을 거부하면서 부도가 발생한 사태다. ABCP 투자자들에게는 시장 신뢰가 무너진 사건이다. 투자자들이 부동산 PF에서 발을 빼면서 증권사들이 자금부담을 떠안게 됐다. 부랴부랴 자체 자금으로 인수하는 증권사들도 잇따르고 있다. 대형사들은 발행어음이라도 찍어서 자금을 모집하지만, 중소형사들은 국채 등 보유한 자산을 팔아서 자금을 만들어야 한다. 단기 자금시장이 얼어 붙으면서 증권사들의 일상적인 자금조달도 어려워졌다.
증권사들이 매입 확약을 해준 부동산 PF는 10월에만 14조 9392억 원어치가 만기가 돌아온다. 메리츠증권 2조 344억 원, 삼성증권 1조 8434억 원, 한국투자증권 1조 4412억 원, KB증권 1조 1899억 원, 하이투자증권 8668억 원, 하나증권 7693억 원, 현대차증권 6442억 원, BNK투자증권 5332억 원 등이다.
최근 금융투자협회는 한국은행에 직접 자금시장에 개입해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금융당국은 금투협을 통해 중소형사들이 보유한 ABCP를 인수하기 위해 대형사들이 갹출을 해 긴급자금을 만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뜻이다. 중소형 규모라 하더라도 일단 증권사가 무너지면 그 파장은 도미노처럼 업계 전체에 미칠 수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