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 중 일부도 자금 조달 애 먹어”…정부 대응 나섰지만 투심 회복 여부 지켜봐야
금융투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9월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률(미매각금액/전체 발행금액)은 20.5%로 전년 동기 0.2%에서 급증했다. 상황이 악화된 데는 레고랜드 사태가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에 따라 유동성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시장의 신뢰를 깨는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해 일반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레고랜드 사태는 지난 5월 5일 개장한 테마파크 레고랜드 관련 공사 과정이 발단이 됐다. 강원도 산하의 강원중도개발공사(GJC)가 레고랜드 개발 자금을 조달을 위해 특수목적법인(SPC) 아이원제일차를 설립해 2021년 11월 2050억 원 규모의 자산담보기업어음(ABCP)을 발행했다. 발행 당시 신용등급은 가장 높은 단계인 A1이었다. 강원도가 보증채무를 선 덕분에 이 같은 신용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채권만기일인 지난 9월 29일 강원도가 보증채무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현재 수익구조로는 짊어진 채무를 갚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하루 뒤인 30일 아이원일차는 부도처리됐다. 시장에서는 우량 채권인 A1 등급의 채권이 부도처리된 점을 주목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지급 보증을 선 채권도 부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조성됐다.
시장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한국은행 금융시장국 채권시장팀의 ‘최근 신용채권시장 상황 평가: 신용스프레드 확대요인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지난 14일 기준 회사채(AA-) 스프레드는 114bp(1bp는 0.01%포인트)를 기록했다. 이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듬해인 2009년 이후 최대 수준이다. 회사채 스프레드란 회사채 금리와 국고채 금리의 차이로, 스프레드가 확대될수록 회사채 가격이 하락한다. 일반 기업과 금융기관의 자금 조달 비용이 늘어날 것으로 관측되는 대목이다.
이는 투자심리 위축에 따른 결과로 풀이됐다. 한국은행 채권시장팀은 “회사채 등 신용 스프레드가 큰 폭으로 확대했지만 과거처럼 신용등급 간 스프레드가 확대되지 않고 있다”며 “부도 가능성 등 신용 위험이 현재화될 우려보다 유동성이 낮은 신용채권 전반에 걸쳐 투자심리가 위축됐다”고 설명했다.
대형 증권사에서 채권분석을 담당하는 A 연구원은 “신용으로 거래되는 채권들의 신뢰도가 하락했다”며 “사실상 초우량 채권으로 분류되는 한전채 금리가 기존 4%에서 6%로 상향 조정돼 거래되고 있다.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레고랜드 사태로 시작된 채권시장 충격이 증시로 옮겨갈 수 있다. 자금의 수요가 높은 성장주나 IT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현재 5대 그룹 가운데 일부 회사도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정부가 시장에 내놓는 정책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겠지만 아직 시장에 돈이 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 분위기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불필요하게 시장에 혼란을 줬다. 중앙정부와 교감도 부족한 모습이다”면서 “현재 과도하게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안이 심각하자 정부는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지난 23일 우선 50조 원 이상의 유동성을 채권시장에 공급하기로 했다. 채권안정펀드(채안펀드)를 20조 원 규모로 조성하고, 회사채·기업어음 매입 프로그램 등으로 16조 원, 한국증권금융 증권사 유동성 지원으로 3조 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주택금융공사 사업자 보증지원으로 10조 원 등을 공급할 계획이다.
또 다른 증권사의 채권 매니저 B 본부장은 “50조 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 계획은 단기적으로 위축된 투자심리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시장은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규모 유동성 공급을 경험한 바 있어 규모만큼 시장에 공급되는 속도가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고랜드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강원도는 여론이 악화되자 급하게 불끄기에 나서고 있다. 올해 안에 문제가 된 보증채무 전액 상환 계획을 밝혔다. 정광열 강원도 경제부지사는 27일 강원도청에서 “강원도는 이미 납부한 선취이자 만기일인 2023년 1월 29일까지는 예산을 편성해 전액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채권자를 비롯한 금융시장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검토하고, 기획재정부 등 정부와 긴밀히 협의해왔다”며 “그 결과 오는 12월 15일까지 보증채무 전액(2050억 원)을 상환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채권시장이 안정세로 접어들지는 미지수다. 채권시장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번 레고랜드 사태는 크레딧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으로 시장은 받아들이고 있다”며 “강원도의 상환 결정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지 여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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