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에서 당명만큼 운명이 기구한 것도 없다. 총선, 대선, 지자체선거는 물론이요 보궐선거에서라도 패배하면 일단 당명부터 바꾸자고 한다.
당명개정은 야당에서 잦았다. 여당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지만 야당 정치는 파벌 간의 이합집산의 연속이었다. 걸핏하면 보따리 싸고 집을 나가 쪽방에다 문패를 내거는 게 야당의 행태였다. 독재권력의 야당에 대한 분열공작의 영향도 있었다.
당명에 들어가는 기둥 어휘는 ‘민주’였다. 거기엔 여야의 구별이 없었다. ‘민주’의 앞뒤엔 온갖 거룩한 관념의 수식어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한국, 국민, 평화, 통일, 통합, 자유, 정의, 공화, 새로움(신), 큼(대), 선진, 창조 등 더 이상 갖다 붙일 거룩한 단어가 있을까싶다.
야당의 경우 해방정국의 한국민주당을 시발로 민주당, 신민당, 민정(民政)당, 신한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을 거쳐 민주통합당에 이르렀다.
야당의 당명개정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의 집권기간에 더욱 어지러웠던 것은 분열이 야당의 고질임을 보여준다. 요즘 들어 ‘통합’이 야당작명의 유행어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최근 통합민주당이 민주통합당으로 됐듯이 수식어의 조합순서만 앞뒤로 바꾼 개명이나, 스스로도 헷갈렸던지 그냥 ‘민주당’으로 되돌린 개명도 부지기수다.
‘민주당’이 야당의 약칭이 된 것은 1공화국 이래의 전통으로, 거기엔 민주수호의 노력에 대한 국민적 인정의 뜻도 담겨 있다. 여당도 자유당 이후 민주공화당(공화당), 민주정의당(민정당), 민주자유당(민자당)처럼 ‘민주’를 표방했지만 결코 ‘민주당’으로 불리진 않았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새누리당과 함께 한글 당명이다. 민주니 자유니 하는 허울뿐인 관념적 어휘가 배제된 것 만큼은 바람직했다. 그런 좋은 이름을 몇 년 쓰다 헌신짝 버리듯 하니 세종임금도 실망하실 게 분명하다. 정당들은 당명 바꾸기라는 가장 쉬운 변화 제스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보려하지만 그것이 이렇듯 잦은 것은 아무리 겉만 바꿔봤자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영국과 미국의 주요 정당은 모두 100년이 넘었고, 미국의 민주당은 200년이 넘었다. 해방 후 명멸한 정당 수만 해도 150여 개에 이르는 우리 풍토에서 그런 정당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을 표현함)다. 당장 4월 총선에서 패배한 정당은 당명을 또 바꾸자고 할 것이다. 정당들이 장수하기를 바라며 “모두 이겨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이 한심할 따름이다.
한남대 교수 임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