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근 청장 현장대응 미흡 인정, 담당기관·책임자 수사 속전속결…일선 경찰 분통 “윗선 결정 과정 밝혀야”
경찰청은 11월 1일 ‘이태원 사고 이전 112 신고 내역 녹취록’ 11건 자료를 공개했다. 참사 우려와 관련된 112 첫 신고는 10월 29일 참사 발생 약 4시간 전인 오후 6시 34분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녹취록에 따르면 신고자들은 인파가 몰린 위험한 상황에 대해 총 9차례 ‘압사’란 단어를 언급했다. 이에 경찰은 4번 현장에 출동했고, 신고지점 주변의 사람들을 해산하는 조치를 취하는 데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의 안이한 판단으로 사고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날 경찰청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112 신고를 처리하는 현장의 대응이 미흡했다”고 인정하며 “사전에 위험성을 알리는 112 신고를 받고 제대로 조치했는지에 대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겠다. 112 신고 처리를 포함해 전반적인 현장 대응의 적정성과 각급 지휘관과 근무자들의 조치가 적절했는지 등도 빠짐없이 조사하겠다”고 고강도 감찰을 예고했다.
이번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경찰청에 독립적인 특별기구를 설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윤 청장은 “제 살을 도려내는 읍참마속의 각오로 진상 규명에 임하겠다”며 “독립적인 특별기구를 설치해 투명하고 엄정하게 사안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자신들의 실책과 치부를 스스로 공개한 배경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질타가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전해졌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경찰의 미흡한 대응 조치를 보고 받고, 상당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어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철저히 진상을 밝히라”며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경찰이 자체 판단해 관련 상황을 공개했다는 분석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녹취록을 은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라는 평가다. 경찰 한 관계자는 “112 신고 녹취록은 국민들에 큰 충격을 줄 내용이었다. 하지만 은폐가 불가능한 구조다. 국회를 통해 결국엔 자료가 공개될 수밖에 없다. 이에 선제적으로 공개하고 잘못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112 신고 내역 녹취록이 공개되자 정부여당의 포문은 일제히 경찰로 향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1월 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면서 “대단히 엄정한 수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한덕수 총리도 같은 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경찰은 특별수사본부와 감찰을 통해 철저히 조사하고 국민들께 투명하고 소상하게 설명하라”며 “정부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상응하는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고 밝혔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같은 날 비대위 회의에서 “몹시 당혹스럽고 유감스럽다. 네 번이나 현장 출동했던 경찰의 현장 판단이 왜 잘못됐는지, 기동대 병력 충원 등 충분한 현장 조치를 왜 취하지 않았는지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며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12 신고 늑장대응과 관련해 즉각적인 감찰과 수사가 들어갔다. 특별수사본부는 2일 서울경찰청과 용산경찰서, 용산구청, 서울시소방재난본부 서울종합방재센터, 용산소방서, 서울교통공사, 다산콜센터, 이태원역 등 8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2일 이임재 용산경찰서 서장을 대기발령한 데 이어, 다음날은 서울경찰청 상황관리관 류미진 총경도 대기발령했다. 더 나아가 경찰청은 두 사람을 업무태만 이유로 특수본에 수사의뢰하기로 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을 대상으로 하는 감찰 조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경찰 내부에서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 나오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참사 책임론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일선 경찰의 늑장대응 문제로 시선을 돌려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경찰 내부망에는 이태원 참사 당시 이태원 골목에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해 용산경찰서가 서울지방경찰청에 기동대 경력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자신을 ‘3년째 이태원파출소에서 근무 중인 직원’이라고 밝힌 A 씨는 1일 “사건 당일 18시부터 22시까지 총 79건의 신고가 접수됐으며 당시 근무 중이던 20명의 이태원 파출소 직원이 최선을 다해 근무했다”며 “핼러윈 대비 당시 안전 우려로 인해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 기동대 경력 지원요청을 했으나, 지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경찰 내부망에 글을 올렸다.
이어 윤희근 청장의 112 신고 현장 대응 미흡 발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용산서 직원들은 무능하고 나태한 경찰관으로 낙인 찍혀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며 “어떤 점을 근거로 그런 발언을 하셨는지 궁금하다”고 직격했다. 또한 해당 글에는 “무능한 지휘관이 경찰을 무능하게 만들고, 한심한 지휘관이 현장요원 죄인 만든다” “총체적 책임은 지휘부에 있으니 일선에 책임 묻지 말고 지휘부가 책임져라” “직원들 고생한 사실 다 아는데 위쪽만 모른다” 등 A 씨에 호응하는 댓글이 달렸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청의 한 팀장급 경찰 관계자는 “112 신고에 대해 경찰이 미흡하게 대처한 면도 있다. 이 역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책임을 따져야 한다”면서도 “적극 대응하려 해도 상부의 지원이 없었다. 또한 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지 못했는지를 우선 규명해야 한다. 사전에 안전계획을 왜 수립하지 않았는지, 기동대가 왜 배치되지 않았는지, 윗선의 결정 과정 문제를 밝혀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112 상황실과 지구대 등 일선 경찰들의 문제로 몰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귀띔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112 신고 녹취가 공개되고 1일 이상민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 윤희근 경찰청장이 연이어 사과를 발표했다. 여권의 움직임을 보면 일선 경찰 및 경찰조직을 희생양으로 삼아야겠다는 방향성이 정돈된 것으로 보인다. 한날에 책임자들이 줄지어 사과를 하는데 대통령실과 조율이 없었겠느냐”고 추정했다.
다만 112 신고 녹취록 공개와 이에 따른 특별감찰 수사가 윗선으로 가는 책임론을 차단하고 ‘꼬리’ 수준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서 야권 관계자는 “이임재 용산서장뿐만 아니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도 경질이 불가피하다는 게 거의 기정사실처럼 나온다”며 “윤희근 경찰청장의 거취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윤희근 청장마저 사퇴압박에 그만둔다면, 그 여파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과 한덕수 총리에게까지 번져갈 수 있다”고 전했다.
국민들의 신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선 경찰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공무원을 움직이는 건 고위 공직자들의 리더십이라는 지적이다.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민주당의 한 전략통은 “관료화된 사회를 잘 움직이게 하려면 선출직 공직자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현장을 파악하고 있는지, 명령 하나하나가 하부 단위까지 잘 내려가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며 “공무원은 보수적인 집단이다. 정부의 기조에 맞추는 게 공무원들이다. 국가 지도자가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공권력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이번 참사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윤석열 정부의 세부적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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