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 만취난동 탓? 유족들 요구로 재조사…통제 및 대응 실패·책임전가·진술조작 드러나 결국 총리 등 사과
이번 참사가 33년 전 영국에서 일어난 ‘힐스버러 참사’를 떠오르게 한다고 말하는 해외 언론들도 있다.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당한 영국 역사상 최악의 스포츠 참사로 기록된 ‘힐스버러 참사’는 수십 년간의 공방 끝에 현재 ‘인재’로 결론지어진 상태다. 실제 이태원 참사와 힐스버러 참사는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티켓을 끊고 입장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다는 점만 다를 뿐, 좁은 장소에 밀집된 군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압사했다는 점, 경찰이나 안전요원에 의한 군중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됐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랬다. 힐스버러 참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며, 혹시 놓치고 있는 점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1989년 4월 15일, 사우스요크셔주 셰필드에 위치한 힐스버러 스타디움. 경기장 주변은 아침부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899년에 건설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이지만, 전통적으로 FA컵 준결승전은 중립적인 장소에서 열렸기 때문에 이날은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들로 가득 차있었다.
리버풀 팬들에게 할당된 구역은 ‘레핑스 레인’에서 진입하는 총 수용 인원 2만 9800명인 구역이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리버풀 팬들은 2만 4200명 정도. 노스스탠드와 사우스스탠드, 그리고 웨스트스탠드의 2층은 모두 좌석이 설치돼 있었지만, 웨스트스탠드 아래쪽 테라스 구역은 총 1만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딩석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가 맞닿은 채 서서 경기를 관람해야 했지만, 경기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이기도 했다.
위험 징후가 감지된 곳은 골대 바로 뒤쪽에 위치한 3, 4번 구역이었다. 이 구역의 정원은 1600명이었지만, 이날 이곳에 들어찬 사람들은 무려 3000명이었다. 경기 시작 10분 전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이 구역으로 몰려들면서 무려 두 배 가까운 인파가 좁은 공간에 밀집되기 시작한 것이다.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이미 앞쪽에 자리를 잡고 서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은 점점 앞으로 밀려 나갔고, 급기야 철망 울타리에 몸이 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철망은 훌리건 난입을 막기 위해 설치해놓은 것으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여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평소에는 경찰이나 안전요원이 입구에 서서 관중이 꽉 차면 다른 쪽 구역으로 유도하곤 했는데, 이날은 어찌된 일인지 그런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경기 시작 직전까지 계속해서 해당 구역으로 돌진해왔고, 압박감을 느낀 앞쪽 사람들은 점차 숨을 쉬기조차 힘든 지경이 됐다.
경기는 예정대로 오후 3시 정각에 시작됐다.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입구 터널을 통해 문제의 3, 4구역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훗날 리버풀의 브루스 그로벨라르 골키퍼는 “뒤에서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했다.
결국 몇몇 사람들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울타리를 넘으려고 했지만, 경기장에 난입하는 훌리건으로 착각한 경찰은 이를 저지했다. 그리고 오후 3시 4분쯤, 리버풀 선수의 슛이 상대 골문을 맞고 튕겨 나오자 관중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철망 울타리 가운데 하나가 무너졌고, 사람들이 앞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우스요크셔 경찰국장은 경기장으로 달려갔고, 즉시 경기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휘슬이 울린 지 5분 30초 만에 경기는 중단됐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철제 울타리를 강제로 열자 사람들이 속속 경기장으로 쏟아져 나왔고, 일부는 아예 울타리를 넘어 경기장 안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2층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먼저 탈출한 사람들은 철망 울타리에 구멍을 뚫어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한시가 급했다. 압박성 질식으로 의식을 잃거나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경찰과 안전요원, 응급구조대원들이 속속 도착해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경기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경기장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시민들은 직접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광고판을 뜯어내 환자를 이송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타임’은 “이미 사망했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경기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최악의 참사에 곧 영국 전역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전국에서 추모 물결이 이어졌고, 리버풀은 FA 측에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경기를 치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현재 리버풀 홈구장 ‘안필드’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4월 15일이 되면 추모제도 열리고 있다.
추모 기간이 지나자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진상조사가 실시됐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였다. 여론은 양쪽으로 갈렸다. 한쪽에서는 ‘훌리건 탓’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경찰의 부적절한 대응 탓’이라고 주장했다.
사우스요크셔 경찰은 리버풀 팬들이 만취한 상태에서 무질서하게 난동을 부린 결과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일부는 티켓을 끊지 않고 숨어 들어왔고, 강제로 철망 울타리를 열어 경기장에 난입했으며, 수천 명의 팬들은 일부러 경기 시작 시간이 다 돼서야 경기장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찰 발표에 마거릿 대처 전 총리도 힘을 실어주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대처 전 총리는 특히 훌리건을 혐오했다. 대처 내각은 날로 증가하고 있던 축구장 폭력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축구 관중법을 제정하려던 참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모든 축구팬들은 의무적으로 신분증 제도에 가입해야 했다. 대처 전 총리는 참사 후 힐스버러 스타디움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유가족은 방문하지 않은 채 오로지 경찰과 지역 관리들과만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
언론도 거들었다. 참사의 책임을 리버풀 팬들에게 돌린 타블로이드지 ‘더 선’은 경찰의 초기 브리핑을 바탕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술에 취한 훌리건들이 고의적으로 응급구조대를 방해하거나, 경찰관을 향해 소변을 보거나, 심지어 희생자들의 돈을 훔쳐 달아났다고도 주장했다.
이렇게 리버풀 팬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분위기는 1991년 ‘테일러 보고서’가 발표될 때까지 계속됐다. 사건을 조사한 테일러 대법관의 의견은 달랐다. 테일러는 이 보고서에서 “그날 경찰의 치안 유지 활동은 실패했다. 참사의 주요 원인은 경찰이 효과적으로 군중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1987년과 1988년 준결승전에서도 혼잡이 발생했기 때문에 올해라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예상할 이유는 없었다’는 고위 경찰관들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사고 당일 경찰의 대응은 단시간에 대규모 인파가 집중될 경우 이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비교적 여유로운 구역으로 사람들을 유도하지 못한 것이 “초기 대응의 큰 실수”였다고도 꼬집었다.
또한 보고서는 “위기를 느낀 관중들이 처음 울타리를 넘어 경기장으로 진입했을 때 통제실에서는 그저 훌리건들의 소행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일은 경기 초반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경기장에 진입한 사람들이 경기장 안쪽으로 더 달려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이들이 훌리건일 가능성은 확실히 낮았다”고 비판했다. 음주 혐의도 부인했다. ‘테일러 보고서’는 당시 대부분의 팬들은 “만취한 상태도 아니요, 심지어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는 계속해서 논쟁이 뒤따랐고, 1991년 법원은 결국 이 사건을 돌발적인 사고사로 결론지으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즉시 반발하고 나섰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고 주장한 유가족 측은 사고 발생 전부터 이미 위험한 상황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는 점을 들었다.
1981년 토트넘 홋스퍼와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의 FA 준결승전에서도 초과 인원이 입장하면서 팔, 다리,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3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가 하면, 1988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준결승전에서도 군중 압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 팬은 축구협회와 체육부 장관에게 “해당 구역 전체가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신변 안전에 상당한 우려를 느꼈다”고 신고하기도 했었다.
결국 유가족들의 끈질긴 요구로 영국 정부는 2009년 진상조사위원회인 ‘힐스버러 독립패널’을 새롭게 구성하고 재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참사 발생 23년 만인 2012년 9월 12일, 2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395쪽에 달하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경기장에 예전부터 도사리고 있던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고, 희생자들에게 조직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려고 시도했다.
경찰이 목격자들과 관련자들의 진술 164건 가운데 116건을 위조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경찰에게 불리한 댓글을 삭제하거나 수정했으며, 심지어 검시관이 최연소 사망자인 열 살 어린이를 포함해 사망한 모든 사람의 혈중 알코올 수치를 측정했다고도 보고했다. 알코올 수치 검사 결과, 만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응급구조대의 초기 대응에도 문제가 있어 구할 수 있었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조사위는 응급구조대의 대응이 신속히 이뤄졌다면 사망한 96명 가운데 최대 41명은 살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일부 희생자들이 압박 상황에서 벗어난 후 얼마 동안 심장, 폐 또는 혈액 순환 기능이 작동하고 있었는데도 부적절한 대응 탓에 기도가 폐쇄돼 사망했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발표되자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정부를 대표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희생자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캐머런 전 총리는 “경찰, 소방당국 및 여타 당국이 재난 발생을 미리 예측하거나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다. 또한 목격자 진술을 위조해 경찰의 실수를 은폐했고,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에게 ‘이중적으로 부당함’을 겪게 했다”면서 “참사의 원인은 리버풀 팬들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켈빈 맥켄지 ‘더 선’ 전 편집장 역시 “우리는 힐스버러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해 부정확하고 공격적인 이야기를 보도했다”면서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때의 엄청난 반감으로 시행된 불매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후 도미닉 그리브 법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고등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새로운 심리를 열 것을 명령했다. 두 번째 심리는 2014년 3월 31일 시작됐다. 그리고 2년 후 배심원단은 원심 판결을 뒤집고 96명의 피해자 전원이 과실치사로 사망했다는 평결을 내렸다. 경찰과 구급대가 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해 무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희생됐으며, 경찰이 태만으로 인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증거와 진술을 위조하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현장을 총괄지휘했던 경찰서장 데이비드 더켄필드 역시 재심에서 “끔찍한 거짓말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으며, “경기장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게이트를 열라고 명령한 건 실수였다”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게이트를 통해 들어왔을 때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지 못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스런 일 가운데 하나다”라고도 말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조사보고서 내용 17항목 가운데 모든 항목이 경찰의 과실로 인정됐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얻기까지 무려 27년이 걸린 셈이다. 그동안 주정뱅이로 몰리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던 유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사로 두 딸을 한꺼번에 잃은 트레버 힉스는 27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된 후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거물이든, 어떤 조직에 속해있든, 당신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대중들이 당신을 뒤쫓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18세 아들을 잃은 마거릿 아스피널은 “나는 우리가 역사의 한 부분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실제 힐스버러 참사 이후 영국 축구장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안전이 강화됐고, 스탠딩 구역은 모두 좌석으로 대체됐으며, 철망 울타리 대신 해저드를 파놓았다. 안전에 만전을 기한 결과 힐스버러 참사 이후 지금까지 영국 축구장에서는 별다른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테일러 대법관이 경고했듯이 “안전의 가장 큰 적은 안일함”이기 때문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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