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분권촉진위원장에서 2주 만에 자리를 옮기게 된 이달곤 정무수석. 청와대의 인물난을 방증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두 명이 비리 연루 의혹으로 사퇴한 뒤 청와대는 후임 인선으로 진통을 겪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인선이 늦어지면 공백으로 인한 여파도 클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공직을 역임했던 검증된 인물을 우선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후임 이계철 방통위원장이나 이달곤 정무수석 선정까지엔 적잖은 난항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달곤 수석의 경우 불과 2주 전인 지난 2월 1일 장관급인 지방분권촉진위원장에 임명되었다가 차관급인 정무수석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 셈이어서 인선과정이 수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임명장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새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는 평이 나왔을 정도.
이번 인선에 대해선 두 인사 모두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청와대가 이번 인선을 하며 얼마나 인물난에 시달렸는지 보여주는 결과”라고 평하기도 했다.
경남 창원 출신의 이달곤 신임정무수석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사 학위를 받은 뒤 행정학으로 전공을 바꿔 미국 하버드대에서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을 바꾼 이유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공학을 공부할 때 반도체 시계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전공을 바꾼 이때의 선택은 훗날 그의 인생을 달라지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장과 한국행정학회 회장, 행정안전부 장관 등을 지내는 등 행정학 분야에서 탄탄한 경력을 이뤄가며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 것.
국민의 정부 시절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으나 이 정무수석이 본격적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인수위원회에서 법무행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18대 총선에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처음 이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이 대통령이 미국에 유학 중이던 1999년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개인적 만남을 갖게 되었던 것.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정무수석은 “(이 대통령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나눴던 주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인연으로 훗날 인수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사람’으로 탄탄대로의 정치 인생을 시작하는 듯 보였다.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에 들어온 뒤 2008년 국회 자체 평가에서 입법 활동 1위 의원으로 선정됐고 새누리당 ‘일하는 초선 의원들의 모임’ 대표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정무수석과 이명박 대통령의 또 다른 연결고리 중 하나는 바로 자전거다. 이 대통령은 임기 초반부터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을 표방하며, 4대강 주변 자전거 전용도로 개설 등 각종 자전거 정책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정무수석 역시 행안부 장관 시절 자전거 이용 장려를 위한 ‘대한민국 자전거축전’을 개최하는 등 ‘자전거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도 자전거를 즐겨 탄다는 그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며 자전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2010년 6·2 지방선거는 그의 정치인생에 고비였다. 당시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하며 공직사퇴 시한 마지막 날 저녁 7시 무렵에야 사표를 낼 만큼 출마 결심까지의 과정도 수월치 않았다. 여권 내에선 이 정무수석의 출마를 강하게 요청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이미 경남지사 경선 출마를 선언했던 이방호 전 사무총장과의 경쟁을 앞두고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 그가 사퇴하면서 동시에 경남지사 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후보 자리를 두고 내부 조율이 매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밀려난’ 이방호 전 총장의 예비후보 사퇴 선언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이러한 불협화음은 경남지사 선거에 나섰던 이달곤 수석에게도 흠집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경남지사 선거에서 무소속 김두관 지사에게 선거운동 당시 박빙의 경쟁을 펼친 것과는 달리 7%포인트라는 예상외의 큰 격차로 패하면서 이달곤 수석은 정치인으로서의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이 수석의 패배는 비단 개인의 선거 패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흐름 지금 ‘나비효과’와 같은 후폭풍을 불러온 작은 시발점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김두관 지사가 정치입지를 굳건히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지방선거였기 때문. 김 지사는 당시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며 세 번의 도전 끝에 경남지사 선거에 승리하며 이후 대권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후 이달곤 정무수석은 별다른 정치 행보를 하지 않아오다가 지난해 8월 MB 정부의 주요 전직 장·차관들이 모여 만든 ‘더 좋은 나라 포럼’ 발기인으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이 모임은 표면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이념과 가치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참여인사들이 ‘MB친위대’로 불릴 만큼 ‘이명박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일각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기 위한 정치세력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특히 이 모임에서는 ‘반 포퓰리즘’을 주장한 바 있어 최근 이 대통령이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에 비판을 내놓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이 정무수석이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달곤 정무수석은 지난 16일 임명장을 받은 뒤 “네트워크 정무, 열린 정무가 되겠다”고 역할론에 대해 밝혔다. 행안부 장관 시절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항상 자신에게 온 국민들의 엽서 뭉치를 들고 다녔다고 하는 이달곤 신임 정무수석. 이명박 대통령이 종종 비판받는 ‘소통 부족’ 이미지를 작게나마 해소시킬 수 있을지 기대된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