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산간 지대에 자리한 선흘리. 10만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우거진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 동백동산이 있다. 그곳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녀는 아득한 파도가 떠올랐단다. 우거진 나무들이 쉬쉬 소리를 내며 출렁이던 숲의 바다.
이영이 씨(62)는 순전히 그 숲에 이끌려 제주에 자리 잡았다. 빛과 어둠, 나무와 돌, 날짐승과 들짐승, 무수한 야생의 생명이 뒤섞인 채 조화로운 곳. 마음 밭이 퍽퍽할 때면 그 야생의 자연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이 씨는 숲의 바다가 펼쳐지는 그 땅에 오랫동안 꿈꿔왔던 작은 학교의 문을 연다.
"누가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흙을 만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아이들이 저절로 순해져요. 내가 그 자연과 다르지 않거든요."
밭과 나무들 사이에 자리를 튼 푸른 지붕의 제주 전통가옥. 집도 자연의 일부 같은 이곳은 열두 명의 아이들과 이영이 씨가 24시간 공동체 생활을 하는 '볍씨학교'다. 광명YMCA를 거쳐 수십 년 대안교육에 힘써온 영이 씨는 줄곧 바랐다.
본래 인간의 본성은 몸도, 마음도 자연에 가까운 바 자연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볼 순 없을까.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사람살이의 기본을 배울 순 없을까.
내 손으로 농사지어 먹고 옷도 집도 직접 짓는 그런 학교. 거친 땅과 깊은 숲이 교정이 되고 풀벌레와 나무가 스승이 되는 그런 야생 학교. 볍씨학교는 그 오랜 소망의 결정체다.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에 세 번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밭에서 수확을 하고, 생태화장실을 쓰며 나의 분변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 나무를 키운다.
이렇듯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아만 가는데도 아이들은 더없이 순하면서도 굳세다.
볍씨학교의 뜨락은 들깨, 황국, 갯무, 레몬밤 등 작물과 꽃, 들풀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영이 씨가 심은 것보다 바람이 데려온 것들이 더 많다.
'잡초 좀 뽑아라, 들깨 좀 솎아라' 남들의 잔소리가 날아들지만 야생초의 뿌리는 작물을 붙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야생화의 씨앗은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제 나름의 역할이 있기에 영이 씨는 그저 있는 그대로 둔다.
아이들이 부치고, 먹는 밭도 잡초 반, 작물 반인 야생 밭이다. 지난 태풍에 쓰러지지 않은 고추밭은 영이 씨네 야생 밭이 거의 유일했다. 사람들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야생의 생명 세계는 서로 도와가며 풍요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곧 자연의 이치다. 그러니 굳이 손댈 이유가 없다. 정갈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자연이 알아서 조화를 이룬 야생 그대로의 풍경. 마을 돌담길을 걸어가는 영이 씨 머리 위로 툭, 벌써부터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동백 씨앗이 떨어진다.
닭 울음이 서서히 마을에 차오르는 새벽. 열두 명의 아이들은 동백동산을 향해 전력 질주를 한다. 예순이 넘은 이영이 씨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침마다 야생의 자연으로 몸을 힘껏 밀어 넣으며 나를 깨우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뛰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뿌듯해지기에 영이 씨는 매일같이 뛰고, 또 뛴다.
깊어가는 가을밤이면 또한 동백동산의 어둠 속을 걷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고요히 밤을 지새우는 이름 하여 고독한 밤. 어둠의 공포는 어느새 은하수를 좇는 모험이 되고 짙은 어둠을 거대한 이불 삼은 야생의 자연처럼 곤한 잠에 든다.
야생의 모든 생명은 자기 앞의 모든 상황을 결코 회피하는 법이 없다. 언제든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그렇기에 야생 만물은 한 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나는 오늘 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 '나는 지금의 나에 만족했는가?' 야생이 숨 쉬는 소리가 내 안에 들려올 때 사람도 우뚝하게 설 수 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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