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때 일기에 적은 ‘버킷 리스트’ 하나씩 이뤄내…남은 건 KS 우승과 MLB 진출
이정후는 올 시즌 142경기에서 타율 0.349(553타수 193안타), 홈런 23개, 113타점, 출루율 0.421, 장타율 0.575을 기록하면서 타격 5관왕(타율·타점·안타·출루율·장타율)에 올랐다. 그는 "2017년 신인상을 받으러 이 시상식에 왔을 때, MVP를 수상하는 양현종(KIA 타이거즈) 선배님을 보고 '언젠가 저 상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날이 오게 돼 영광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최우수 신인선수상(신인상)은 두산 베어스 투수 정철원(23)이 받았다. 정철원은 기자단 투표에서 107표 중 74표(69%)를 얻어 역대 두산(전신 OB 포함) 선수 중 7번째로 신인왕에 올랐다. 정철원은 "끝까지 다치지 않고 시즌을 완주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상이 따라온 것 같다"며 "학교(안산공고) 선배인 김광현(SSG 랜더스) 형처럼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고 싶다" 포부를 전했다.
#12년 전 일기장에 적은 소망
이정후에게 MVP는 오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12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이던 이정후는 매일 일기를 썼다. 그날 어떤 훈련을 했는지 돌아보고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도 하나씩 적었다. 프로 6년 차가 된 올해, 우연히 그 일기장을 다시 펼쳐 본 이정후는 "기분이 묘했다"고 했다. 그때 목표로 했던 리스트 중 절반 이상을 이미 이뤄냈기 때문이다.
'1차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하기, 국가대표로 뽑혀 국제대회 나가기, 골든글러브 수상하기, 타격왕 되기, 신인왕 되기, 최고의 유격수로 인정받기.' 모두 꼬마 야구선수 이정후가 야심차게 적어내려갔던 포부들이다. 이정후는 프로에서 보낸 첫 5년 동안 이 항목들을 빠른 속도로 지워나갔다. 키움 입단 후 포지션을 외야수로 바꾸면서 마지막 항목을 '유격수' 대신 '외야수'로 고쳐 적어야 했을 뿐이다. 이정후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막연하게 꿈꿔왔던 일들이 하나씩 이뤄졌다는 게 신기하다. 그때만 해도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을 텐데 그 일기장 속 내용이 진짜 '현실'이 됐다니 신기하기도 하다"며 웃었다.
리스트 중 이루지 못한 소원은 딱 3개 남아 있었다. '한국시리즈 우승하기,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하기' 그리고 'KBO리그 최우수선수(MVP) 되기'다. 이정후는 이 중 첫 번째 목표를 위해 올 가을 투혼을 불살랐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키움이 치른 15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공수에서 맹활약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끊임없이 '파이팅'을 외치면서 선배들을 응원하고 후배들을 다독였다. 치명적인 실책을 한 후배 김휘집이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자 "괜찮다. 우리 모두 실수하려고 저기(그라운드에) 나가는 것"이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키움은 결국 준우승으로 포스트시즌을 마감했다. 이정후 역시 '우승'이라는 오랜 꿈의 문턱에서 아쉽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로부터 9일 뒤, 압도적인 득표로 정규시즌 MVP에 오르면서 남은 3개 중 또 다른 하나를 지웠다. 이정후는 "어린 시절의 희망을 하나씩 이뤄나가는 건 내가 계획했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뿌듯하다"고 했다.
#'이종범 아들' 아닌 이정후의 이름으로
이정후는 '바람의 아들'로 이름을 날린 이종범 LG 트윈스 코치의 아들로 잘 알려져 있다. 2017년 프로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는 아버지의 별명을 응용해 '바람의 손자'라는 애칭까지 붙었을 정도다.
이정후의 아버지 이종범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플레이어였다. 특히 1994년 해태(현 KIA) 타이거즈에서 타율 0.393, 안타 196개, 113득점, 도루 84개, 출루율 0.452을 기록하면서 5개 부문 타이틀을 모두 석권했다. 이종범의 4할 타율과 200안타 달성 여부가 시즌 내내 프로야구 최고의 관심사였다. 이종범은 그해 24세의 나이로 정규시즌 MVP에 올랐다. 당시 수상소감에서는 "MVP의 영광을 아버지(고 이계화 씨)에게 돌린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에 오늘이 있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종범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98년 장남 정후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MVP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해 한·미·일 프로야구 최초로 부자(父子) 타격왕에 오르는 역사를 쓴 데 이어 또 한 번 3대 리그 사상 최초로 부자가 MVP까지 대물림하는 신화를 남기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이종범 역시 1994년 투표에 참여한 기자단 52명 중 49명에게 1위 표를 받아 만장일치 수상에 딱 3표가 모자랐다. 다만 올해의 투표인단이 28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정후의 득표율 97%는 더 압도적인 수치로 여겨진다.
이정후는 "그동안 '이종범의 아들'로 살아왔는데, 이 상을 계기로 이제 내 야구인생은 내 이름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꾸리셨으면 좋겠다. 야구 하는 아버지와 나 때문에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께도 자그마한 효도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인사했다.
이정후는 말뿐 아니라 실제 기록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 나가는 중이다. 올 시즌 이종범이 갖고 있던 역대 최소 경기 900안타 기록을 28경기 단축(698경기→670경기)했고, 역시 이종범이 보유하고 있던 역대 최소 경기 1000안타 기록을 다시 779경기에서 747경기로 줄였다.
이제는 다른 팀 코치가 된 아버지도 "아들은 이미 나를 뛰어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코치는 "난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 무대에 데뷔했지만, 정후는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들어가 빠르게 성장했다. 나보다 훨씬 낫다"며 "올해엔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던 장타력까지 끌어올렸다"고 흐뭇해했다.
사실 이정후에게 아버지의 이름 석 자는 자랑스러운 훈장인 동시에 부담스러운 꼬리표였다. 어릴 때부터 어느 야구장에 가든 "네가 이종범 아들이구나. 아버지만큼 잘 하나 보자"라는 관심을 받아야 했고, 야구를 잘해 좋은 기회를 얻어도 "아버지의 후광 덕"이라는 시기 어린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경쟁자는 주변의 동료 야구선수가 아니라 '이종범'이라는 거대한 산이었다.
이정후는 시상식이 끝난 뒤 "학창 시절부터 항상 아버지와 비교돼 힘들었다. 그래도 야구가 좋았기 때문에 이겨내려고 열심히 운동했다"며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등 뒤에서 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MVP나 해외 진출이 조금이나마 답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중 하나를 이룬 게 더 기쁘다"고 토로했다. 다만 '이제 아버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그 평가는 은퇴 후에 받겠다"며 신중하게 몸을 낮췄다. 또 "아버지가 야구에 관한 조언보다는 항상 친구처럼 편하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며 "이렇게 건강한 몸을 물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종범 아내? 이정후 어머니!
이정후가 인터뷰에서 아버지보다 더 많이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2대째 '프로야구 MVP 뒷바라지'를 떠맡고 있는 어머니 정연희 씨다. 20~30대 때는 남편이 스프링캠프와 원정 경기 등으로 1년의 절반 이상 집을 비웠고, 이제는 아들이 KBO리그 최고의 스타플레이어가 돼 전국을 떠돈다. 이들 부자의 식단 관리와 컨디션 관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 씨 몫이다. 경기 결과나 성적에 따라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직업 특성상, 남편과 아들의 스트레스를 곁에서 함께하고 보듬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정 씨는 평소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잘 보이지 않지만, 아들이 생애 처음으로 MVP에 오른 이날만큼은 딸 가현 씨와 함께 시상식장을 찾았다. 그리고 직접 그 장면을 눈에 담다가 기어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정후는 "MVP 상금(1000만 원)과 5관왕 상금(각 500만 원)을 합치면 총 2500만 원인데, 어머니와 상의해 기부하기로 했다"며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위해 거의 30년 동안 고생하고 계신다. 내가 MVP를 받은 기쁨을 가장 많이 누리셔야 할 분이고, 내가 항상 지켜드려야 할 뿐"이라고 했다.
정작 정 씨는 "나보다 남편과 아들이 더 많이 고생했다. 남편과 아들은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라며 "선수 생활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이겨내서 이렇게 좋은 결과까지 얻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또 "예전엔 정후가 남편과 비교돼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은 (이정후와 비교되는) 남편이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농담하면서 "나는 그저 두 사람 다 안쓰러울 뿐"이라고 웃어 보였다.
이제 정 씨가 걱정해야 할 '프로야구 선수'는 한 명 더 늘어난다. LG 트윈스 투수 고우석이다. 고우석은 절친 이정후의 동생이자 이종범-정연희 부부의 딸인 가현 씨와 내년 1월 결혼한다. 이정후가 어머니에게 "둘을 빨리 결혼시키자"고 재촉했다는 후문이다. 하필이면 지난 가을 플레이오프(PO)에서 이정후와 고우석의 소속팀이 맞붙는 바람에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올해 42세이브를 올린 고우석은 이날 세이브상을 수상한 뒤 "곧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데, 가족 중에 내가 야구를 제일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사람'으로는 지지 않도록,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다"는 재치 있는 소감도 남겼다. 정 씨는 "예비 사위 우석이는 참 예쁜 아이다. 아들 정후보다 애교가 더 많다. 어떻게 우리 가족이 됐는지, 참 감사한 일"이라며 또 한 명의 '선수 가족'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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