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년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숙희 씨, 이인희 고문, 고 이병철 명예회장, 고 박두을 여사. 사진출처=이병철 명예회장 전기 <담담여수> |
#소송 언제 결심했나
지난 2월 27일 이숙희 씨가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상속재산 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2일 제기한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과 같은 사안이다. 소송대리도 이 전 회장과 마찬가지로 법무법인 화우가 맡았으며 담당변호사들도 거의 같다.
이숙희 씨가 오빠인 이 전 회장을 좇아 소송에 참여함으로써 범삼성가에는 일대 폭풍이 몰아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마치 편이라도 가른 듯 형제간 다툼도 불가피하게 됐다. 국내 최대 기업집단이자 글로벌 기업 삼성이 선대회장의 상속재산 문제로 형제간 진흙탕 싸움을 벌일 태세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삼성도 상속재산 문제로 형제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 씁쓸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난 2000년 현대그룹 형제간에 벌인 이른바 ‘왕자의 난’이 연상된다”고 전했다. 당시 현대그룹도 우리나라 최대 기업집단이었다.
이숙희 씨의 소송이 몰고 온 파장은 이맹희 전 회장이 소송을 제기할 때보다 더 크게 확대되고 있다. 그동안 말만이 무성했던 ‘다른 상속인’의 추가 소송이 결국 이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형제들의 의견이 양분되는 형태를 띠면서 마치 편이라도 갈린 듯한 모양새다.
사실 이숙희 씨의 소송은 지난해부터 은밀히 나돌던 얘기였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하고 국세청에 신고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 중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에 대한 성격을 명확히 하고자 국세청이 삼성가 상속인들에게 보낸 공문을 받아본 이숙희 씨가 상속재산에 대한 법률 검토를 시작했다는 것. 일각에서는 이숙희 씨가 이에 대한 내용증명을 이건희 회장에게 보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심지어 이숙희 씨가 이미 소송을 제기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이숙희 씨는 소송 직후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 전부터 알아보다가 맹희 오빠가 내면서 같이 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해부터 줄곧 소문의 진상과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접촉했던 아워홈 측의 “그런 사실 없다”라는 답변은 거짓으로 판명 난 셈이다.
법무법인 화우에서 작성한 이숙희 씨의 소장은 이맹희 전 회장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이숙희 씨는 상속재산 문제를 알아챈 지난해 6월 이건희 회장에게 ‘(상속재산에 대해) 합의도 한 바가 없으며, 상속권 포기 의사가 없다’는 진술서를 보내는 등 의사 표시를 적극적으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친오빠인 이맹희 전 회장이 소송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 1957년 이숙희 씨의 결혼식. |
삼성가의 상속재산 다툼에 일약 중심인물로 떠오른 이숙희 씨는 1935년 이병철 선대회장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숙희 씨는 어려서부터 다른 형제들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인희 한솔 고문이 여장부 스타일이고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선대회장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공주처럼 지낸 것과 달리 이숙희 씨는 비교적 서민적이고 자유롭게 성장한 듯하다.
2005년 발간한 이인희 고문의 책 <한솔, 그 푸른 꿈을 향해 걸어온 길> 중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기고’한 글에는 이숙희 씨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자녀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 예전부터 서로 스타일을 평가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누이들을 각각 ‘선인장’(이인희 고문), ‘잡초’(이숙희 씨), ‘장미’(이명희 회장)에 비유했다. 이건희 회장이 둘째누나 이숙희 씨를 잡초에 비유한 까닭을 이명희 회장은 이렇게 분석해놓았다.
“숙희 언니는 주변에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편안하게 대해주며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서민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잡초라고 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형제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서민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이라고 알고 있던 이숙희 씨가 상속재산과 관련해 거액의 소송을 제기한 셈이다.
지난 1957년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삼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한 이숙희 씨는 우리나라의 대표 재벌인 삼성과 LG를 잇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구 창업주와 이병철 선대회장의 친분은 익히 알려진 사실. 제당업과 방송업을 함께 도모할 정도로 당시 삼성과 LG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또 당시 재계에서는 삼성보다 LG의 규모와 영향력이 더 컸다. 당시 삼성과 LG의 결혼이라는 사실 말고도 LG가의 아들이 삼성에서 경영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화젯거리였다.
제일제당과 동양TV 등에서 사원으로 출발한 구자학 회장은 삼성 내에서 탄탄대로를 걸으며 승승장구했다. 1974년 설립한 호텔신라의 초대사장에 올랐으며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의 주요주주였다. 또 삼성그룹의 핵심인 에버랜드의 전신 중앙개발 대표이사도 겸임할 정도로 이병철 선대회장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이 1969년 전자사업, 1974년 반도체사업에 잇따라 진출하자 LG와 갈등이 불거졌고 LG의 아들인 구자학 회장은 더는 삼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자와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려는 삼성을 마뜩찮게 여겼던 LG 쪽에서 구 회장을 불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사자와 그 관계인들을 제외하고 그 진상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다만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이숙희 씨의 말에 따르면 세간에 알려진 것 외에 무언가 사연이 숨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송 직후 인터뷰에서 이숙희 씨는 “남편(구자학 회장)이 회사(삼성)를 그만둔 이유가 있다”며 “너무 신임을 받으니까 시기하고 중상모략하고 난리가 났다”고 말했다.
이숙희 씨는 또 삼성이 이맹희 전 회장을 부당하게 대우해왔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그는 “오빠(이맹희 전 회장)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무능하니까 재산도 못 준다’는 삼성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인터뷰만 놓고 보면 형제들이 ‘서민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으로 알고 있던 이숙희 씨 가슴 속에 쌓인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삼성에서 나와 LG로 돌아온 구자학 회장은 금성반도체 회장 등 LG그룹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처가인 삼성과 반도체사업에서 격돌을 벌인 셈이다. 현재는 급식사업 등에서 자신이 대표이사까지 지냈던 회사이자 조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삼성에버랜드와 경쟁하고 있기도 하다.
▲ 1985년 하와이 가족여행을 떠난 이숙희 씨, 이인희 고문, 고 이병철 명예회장(왼쪽부터). |
결혼 후 슬하에 1남3녀를 둔 이숙희 씨는 삼성은 물론 LG에서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채 가족과 집안만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워홈 관계자는 “이숙희 여사는 경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숙희 씨는 아워홈 법인등기부상 2000년부터 이사(2009년 기타비상무이사 중임)로 등재돼 있다. 재계 관계자는 “법인등기부상 이사로 등재돼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도 “이사회에도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아워홈 관계자는 “등기이사 부분은 우리도 몰랐던 사실이다. 확인해보겠다”고만 밝혔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도 이숙희 씨와 함께 아워홈의 기타비상무이사로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조 회장은 이숙희 씨의 차녀 구명진 씨의 남편이자 조중훈 한진그룹 선대회장의 사남이다.
공교롭게도 조 회장 일가는 상속재산과 관련해 형제(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간 다툼을 겪기도 했다. 삼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다툼이 흡사 한진그룹 형제들이 벌여왔던 싸움을 연상시키는 가운데 조정호 회장이 양쪽 집안에 모두 소속돼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숙희 씨의 소송 제기 소식이 알려지고 난 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숙희 씨의 자택과 그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지난 2월 28일 이숙희 씨 자택 앞에서 집사라고 밝힌 인사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갈 때만 외출할 뿐 평소에도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며 “27일(소송을 제기하던 날)까지는 자택에 머물렀으나 소송 기사가 나간 후 거처를 옮긴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8일 오후 9시쯤 이숙희 씨 자택에서 자녀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정황상 이숙희 씨가 자택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집사에 따르면 “자녀들이 일하는 아주머니와 대화하고 간 것뿐”이라지만 장시간 머물러 일하는 아주머니와 대화만 했을 리는 만무해 보인다.
어린 시절, 훗날 비문에 ‘열심히 살았던 자-이인희’, ‘자유롭게 살았던 자-이숙희’, ‘유난하게 살았던 자-이명희’라고 적어 넣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던 이병철 선대회장의 세 딸들. 그러나 이숙희 씨는 이인희 고문이나 이명희 회장과 비교해 ‘특별한 딸’은 아니었다. 이명희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 있어 이인희 고문이나 나는 특별한 딸이었다. 다른 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경영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경영에 참여하지 못한 채 22세에 일찍 결혼한 이숙희 씨는 77세에 아버지의 상속재산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다. 이숙희 씨는 ‘경쟁사로 재산이 가게 할 수 없다’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지에 따라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 당시 ‘절친’이었던 시댁은 이제 최대 경쟁사가 돼버렸다. 또 친정인 삼성에 대한 이숙희 씨의 섭섭함과 불편한 심기는 대단해 보인다. 지금까지 반응을 보면 이숙희 씨의 소송이 던진 충격파는 이맹희 전 회장의 그것보다 큰 것이 사실이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에 힘을 보태는 소송이니만큼 다른 상속인들의 행동과 상속재산에 대한 다툼이 어떻게 귀결될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누가 이기든 세금은 내야한다?
이맹희 전 회장과 이숙희 씨의 상속재산 인도 청구소송은 상속재산을 둘러싼 형제간 싸움이라는 사실 외에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와 증여세, 편법 상속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다. 한마디로 소송 결과 누가 이기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삼성 지배구조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소송이 원고 이맹희·이숙희의 패소로 끝난다면 증여세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대로 원고 승소로 마무리된다면 편법상속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 세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먼저 이건희 회장의 증여세 논란에 불을 지핀 사람은 이정희 통합진보당 의원이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후인 지난 2월 15일 이 의원은 삼성생명 차명주식에 대해 이건희 회장 명의로 하자는 형제간 합의 여부를 지적한 후 “그런 합의가 있었다면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며 증여세와 가산세액을 합해 “모두 2조 2926억 원을 납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의원의 주장대로 된다면 이건희 회장으로서는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원고 승소 판결이 난다면 다시 한 번 편법상속 문제가 불거진다.
한편 차명재산 상속 문제에 있어서는 CJ 이재현 회장도 자유롭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CJ자금팀장의 살인 청부 사건 이후 CJ 측에서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차명재산’이 있으며, 2009년엔 그에 대한 세금을 낸 것으로 드러난 바 있기 때문이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