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요즘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영화 속 세상이 그저 망상만은 아니다.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고,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면서도 스펙을 쌓아야 하기에 새벽부터 학원을 다니는 청춘이 많다. 그 청춘 중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문장이 위로가 되는 청춘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돈이 없어 연애도, 결혼도 하지 못하는 청춘도 많으니까. 결혼을 했어도 육아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아이 낳는 것을 미루는 청춘도 많으니까.
반면에 <인 타임>에서처럼 늙지 않는 청춘도 있다. 거기선 가난한 자만 늙고 단명한다. 그게 영화 속 진실이기만 할까. 우리 사회도 이미 ‘젊음’이 상품이 되었다. 돈 되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병 걸리지 않고 오랫동안 젊게 사는 일이 제일 중요한, 건강염려증을 웅담처럼 달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부끄럽게도 그들은 내 어머니고 아버지며, 선배고 친구들이며, 그러므로 또 다른 내 얼굴이지만, 그들의 그런 모습들을 보면 반갑지가 않다. 내가 건강하게 사는 일이, 젊게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는 젊음이 떠나는 일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마주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속얼굴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젊음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과 젊음을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젊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젊음을 축복할 수 없고, 아픈 젊음에 연민을 가질 수도 없다.
<티베트의 지혜>를 쓴 티베트의 스승 소걀 린포체는 서양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젊음과 욕망에 아부하는 서양 중심의 현대문명은 돌팔이들의 천국이라고 말했다. 반면 티베트의 지혜로 상징되는 동양문명은 죽음과 늙음을 중시하는 문명이라고. 그에 따르면 죽음과 늙음은 추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지혜의 보고(寶庫)다. 늙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성찰해야 현대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의 본질이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일대기, 배우자, 가족, 집, 일, 친구, 신용카드…. 우리가 안전을 위해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깨지기 쉽고 일시적인 버팀목일 뿐이다. 이 친숙한 버팀목이 제거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는 모르는 바로 그 사람, 우리가 평생 동안 함께 살아왔지만 결코 만나기를 원치 않았던 바로 그 낯선 사람과 만나게 된다.”
어쩌면 그 낯선 사람과 친숙하게 되는 것이 자유인지도 모르겠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철학은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했던 것도 그런 것인지도.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