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하의 기적
카타르 수도 도하는 대한민국 축구사에 좋은 기억을 남긴 장소다. 1993년 10월 열린 1994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 당시 대표팀은 최종전에서 북한에 3-0 완승했지만 일본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같은 시간, 일본이 이라크에 승리한다면 월드컵 본선 진출은 물거품이 되는 상황에서 이라크가 경기 종료 10초 전 2-2를 만드는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 덕분에 한국은 미국 월드컵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들 경기가 열린 장소가 도하였고 이는 '도하의 기적'이라 불렸다.
앞으로 도하의 기적은 다른 사건으로 기억될 전망이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 나선 대표팀, 29년 전보다도 더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별리그 2경기를 치른 상황에서 대표팀은 승점 1점 획득에 불과해 16강 진출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상황이었다. 포르투갈을 상대로 승리가 필수적이었고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가나가 승리한다면 탈락, 무승부 또는 우루과이의 승리가 필요했다. 골득실 또한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 최상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대표팀은 포르투갈에 경기 초반 선제 실점을 내줬다. 그럼에도 후반 막판 극적인 역전골로 승점 4점을 만들었다.
우루과이와 가나도 혈전을 벌였다. 가나는 전반 페널티킥을 얻어냈지만 선방에 막혔다. 전열을 재정비한 우루과이는 2골을 넣었다. 우루과이 또한 승점 4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과 우루과이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뤘다. 앞서 2-3 패배를 당한 한국은 2-1 승리로 골득실을 0으로 맞췄다. 우루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0-2 패배와 2-0 승리를 경험하며 골득실 0이 됐다. 결국, 다득점에서 승부가 갈렸다. 이번 대회 4골을 득점한 한국이 우루과이를 누르고 16강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경기를 마친 한국 선수들은 승리를 거둬놓고도 한동안 숨죽이며 우루과이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고난 딛고 얻은 결실
이번 대회, 대표팀은 유난히 어려움이 많았다. 누군가 저주를 내린 듯 주축 전력들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먼저 주저앉은 이는 손흥민이었다. 대회 개막을 약 20일 앞둔 11월 1일, 안면 골절 부상을 입은 것이다. 대회 출전마저 불투명했다.
좌측면 주전 수비수인 김진수 또한 몸상태가 좋지 못했다. K리그 전북 소속으로 한 시즌을 치르면서 피로가 누적된 것이다. 시즌을 마치고 대표팀에 소집이 됐지만 팀 훈련에 합류하지 못하고 회복에 매진해야 했다. 카타르에 당도해서야 팀원들과 함께 훈련할 수 있었다.
대회 일정에 돌입해서는 또 한 번의 악재가 터졌다. 공격을 책임져야 할 황희찬 또한 부상이 발생해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된 것이다. 2022년 들어 열린 평가전에서 대표팀 내 실질적 에이스로 활약하던 황희찬이었기에 그의 공백은 더욱 뼈아팠다.
경기 중에도 부상자는 추가됐다. 우루과이와의 첫 경기에서 핵심 수비수 김민재의 종아리에 문제가 생긴 듯했고 결국 가나와의 경기에선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다. 3차전에는 출전조차 못 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파울루 벤투 감독 또한 포르투갈전에 임할 수 없게 됐다. 가나전 종료 직후 심판의 종료 휘슬에 항의하다 레드카드를 받은 것이다. 경기 중 감독석에 앉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하프타임에도 라커룸 출입이 금지됐다.
하지만 대표팀은 이 모든 악재를 견뎌내며 승리를 따냈다. 마스크를 쓰고 대표팀에 합류한 손흥민은 이전까지 선보이던 날카로움을 잃은 듯했다. 마스크 착용으로 시야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볼 수 없던 헛발질을 하는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팀의 가장 중요한 골을 만들어냈다. 포르투갈전 경기 막판 1-1 상황이 이어지던 순간, 결정적인 드리블과 패스로 골을 도왔다.
극적인 득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희찬이었다. 앞서 2경기 결장으로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을 그다. 가나전에서는 팀 패배를 벤치에서만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통증이 있던 허벅지 뒷근육에 테이핑을 붙인 채로 교체 출전해 팀을 16강으로 이끄는 골을 자신의 발로 만들어냈다. 득점과 동시에 옐로카드를 개의치 않고 상의를 벗어 던지며 2경기 결장의 한을 풀었다.
격앙된 목소리로 일요신문과의 통화에 응한 이상윤 해설위원은 "선수들이 정말 잘해줬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얻은 결과"라며 "앞서 2경기에서 너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는데 경기 결과가 따르지 않아 선수들도 너무 아쉬웠을 것이다. 오히려 포르투갈전은 전보다 경기력은 나빴지만 승리했다. 축구 참 어렵다. 어쨌든 후배들에게 축하하다는 말 전하고 싶다"는 평을 남겼다.
#포르투갈과의 20년 전 인연
20주년을 맞은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만났다. 결과는 알려진 바대로 1-0 승리. 한국은 사상 최초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운명의 장난인 듯 20년이 흘러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한국은 승리가 필요한 때 포르투갈을 다시 만났다. 한일 월드컵 이후 지난 20년간 맞대결은 없었다.
한국으로선 기분 좋은 기억이었다. 당시 득점에 성공한 박지성과 같은 21세 선수(이강인)가 기대주로 있다는 것 또한 팬들에겐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강인이 일을 냈다. 앞서 2경기에서 점차 출전 시간을 늘려오던 이강인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발로 출전했다. 2021년 3월 이후 21개월 만의 대표팀 선발 출전이었다. 팀의 공격을 지원하던 이강인은 결국 코너킥으로 김영권의 동점골에 관여했다.
20년 전과 달랐던 점은 이번엔 한국과 포르투갈 양국이 동반 16강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20년 전 선배들과 달리 포르투갈 선수들은 한국전 패배에도 16강으로 향하게 됐다. 하지만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앞서 2연승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해 씁쓸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포르투갈의 한국 상대 역대 A매치 전적은 2패가 됐다.
#땡큐 가나! 땡큐 우루과이!
대표팀이 아무리 좋은 경기를 펼친다고 해도 자력 16강 진출은 불가능했다. 우루과이와 가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들은 대표팀의 16강 진출에 적절한 결과를 내며 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
이들은 한국과 포르투갈만큼이나 기묘한 인연을 자랑하는 관계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우루과이는 16강에서 한국을 꺾고 8강에서 가나를 만났다. 1-1 상황이 지속돼 승부는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연장 후반 막판 가나의 슈팅이 우루과이의 골대 빈 곳으로 향하며 골라인을 넘으려는 순간 우루과이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가 손으로 공을 막아냈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반칙이기에 수아레스는 레드카드를 받았다.
페널티킥을 차게 돼 경기를 끝낼 찬스를 잡은 가나였다. 하지만 키커로 나선 아사모아 기안의 킥은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눈물을 흘리며 경기장을 천천히 걸어 나가던 수아레스는 선방의 순간 언제 울었냐는 듯 기뻐하는 모습으로 가나팬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우루과이는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향했다. 가나는 현재까지 당시 8강에서 멈춘 것이 월드컵 역대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다.
가나는 우루과이에게 0-2로 뒤처진 상황에서도 지속해서 역전을 위해 공격적인 경기를 펼쳤다. 2-2 무승부를 만든다면 가나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나는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경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16강 진출을 돕는 듯 보였다. 양측 경기 종료 시점에 시차가 있어 우루과이, 가나의 벤치와 일부 선수들은 한국의 승리 소식을 접한 것으로 보였다. 우루과이는 추가골을 위해 힘을 내는 반면 가나는 경기가 그대로 끝나길 바라며 시간을 끌었다. 심지어 가나 벤치는 추가시간 8분에도 교체카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교체로 물러나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수아레스는 12년 전보다 더 굵은 눈물을 흘렸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던 중국 속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조별리그 3경기 결산
◇전적=1승 1무 1패, 승점 4점
◇득점=4골(조규성 2골 김영권 1골 황희찬 1골)
◇실점=4점
◇경고=5회(조규성 정우영 김영권 이재성 황희찬)
◇퇴장=파울루 벤투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