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국가나 도시 혹은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이나 건축물을 뜻한다. 전쟁 등을 거치며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한 건물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각 지역마다 랜드마크 반열에 올라서는 건물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당시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우던 기업들과 연관이 깊다. 이 때문에 해당 랜드마크의 역사는 기업 또는 산업의 역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새롭게 랜드마크로 꼽히는 건물은 시장과 산업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일요신문이 각 지역 랜드마크와 기업이 얽힌 이야기를 연재한다.[일요신문] 서울시 종로2가 사거리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걷다보면 SK네트웍스 본사가 있는 삼일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종로 일대에서 삼일빌딩이 크게 두드러지는 건물은 아니다. 당장 삼일빌딩 건너편에는 미래에셋 센터원빌딩, 한화빌딩, 시그니쳐타워 등 고층 건물이 즐비하다. 그러나 197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보면 삼일빌딩은 단연 서울시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삼일빌딩은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로 ‘한국의 마천루’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로 커튼월 방식을 적용하는 등 건축계에 미친 영향도 크다. 삼일빌딩 건물주였던 삼미그룹도 1970년대 승승장구하면서 주요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삼미그룹에 경영 위기가 닥친 후에는 삼일빌딩 주인도 수차례 바뀌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걷고 있다.
1960년대 들어 국내 대기업들은 하나둘 고층 빌딩 건설을 추진했다. 쌍용그룹은 1969년 서울시 중구에 18층 높이의 사옥을 건설했고, 한진그룹도 같은 해 23층의 한진빌딩을 준공하면서 고층 빌딩 시대를 알렸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과소비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재벌들 사이에서는 사옥의 높이가 자존심으로 직결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고 김두식 삼미그룹 회장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총수 중 한 명이었다. 삼미그룹은 당시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사세를 키우면서 재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삼미그룹은 당시까지 변변한 사옥 하나 없었다. 이에 김 회장은 삼일대로 인근의 부지를 매입해 고층 빌딩 건설을 추진했다.
삼미그룹 내부에서는 빌딩 건설을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정부가 강남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강북보다는 강남에 사옥을 마련해야 회사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두식 회장은 지하철이 개통되면 삼일대로가 교통의 요지가 될 것으로 판단해 사옥 건설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당시 삼일대로 인근 사무실 수요는 많았지만 고층 건물이 없었다는 것도 김 회장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결정을 내린 김두식 회장은 1968년 빌딩 착공에 들어갔고, 1970년 무사히 완공했다. 빌딩 위치가 삼일대로였기 때문인지 김 회장은 숫자 3과 1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빌딩의 이름은 삼일빌딩(완공 초기에는 삼일로빌딩)이고, 높이도 31층이다. 이는 김 회장이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삼일빌딩 인근에는 3·1 독립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이 있다.
삼일빌딩의 설계자는 고 김중업 씨다. 이전까지 국내 고층 빌딩 설계는 외국인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 건축가가 빌딩 설계를 담당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인지 삼일빌딩은 완공 후 연일 인구에 회자됐고, 김중업 씨의 명성도 그만큼 상승했다. 그러나 김 씨는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71년 프랑스로 강제 추방당하는 등 이후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삼일빌딩은 국내 최초의 커튼월 방식 건물이라는 의미도 있다. 커튼월이란 빌딩 외벽을 투명유리나 반사유리로 마감한 건물을 뜻한다.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등 부대시설이 건물 옆쪽에 설치된 것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층 빌딩의 경우 부대시설이 건물 중앙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건물 중앙에 엘리베이터 등이 있으면 공간 활용에 제약이 따랐다. 삼일빌딩은 부대시설을 옆쪽에 설치해 이를 해결했다.
삼일빌딩은 국내 최고층 건물이라는 지위도 획득했다. 아시아 전체로 살펴봐도 일본 무역센터(42층), 일본 가스미가세키빌딩(36층)에 이어 당시 3위에 해당하는 높이였다. 삼미그룹 스스로도 삼일빌딩 완공을 계기로 부동산 사업에 진출할 정도였다. 삼미그룹은 삼일빌딩을 사옥으로 사용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삼미그룹은 1974년 한국특수강공업을 인수한 데 이어 1977년 삼미금속을 설립했다. 김두식 회장은 1976년 개인적으로 12억 9000만 원의 소득을 신고했다. 이는 당시 4위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5위·12억 5000만 원)을 앞섰다.
하지만 삼미그룹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두식 회장이 1980년 골수암으로 별세하면서 장남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김현철 회장은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창단하는 등 나름대로 재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명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삼미그룹은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던 삼미해운을 매각했다. 그럼에도 부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삼미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의 매각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삼미그룹은 1984년 삼일빌딩을 KDB산업은행(산은)에 매각했다. 삼미그룹은 당초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에 삼일빌딩을 매각할 계획이었다. 당시 사옥이 없었던 산은이 상업은행에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산은은 삼일빌딩을 295억 원에 인수한 후 1985년부터 본사로 사용했고, 삼미그룹은 방배동으로 본사를 옮겼다.
산은은 2001년 여의도 신축 지점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홍콩계 투자회사인 스몰록인베스트먼트에 삼일빌딩을 매각했다. 매각가는 502억 원이었다. 그런데 스몰록인베스트먼트의 실소유주가 조풍언 씨라는 소문이 돌면서 삼일빌딩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만다. 조 씨는 재미 사업가이자 무기 중개상으로 1999년 부인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매입했다. 조 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 수십 건의 군납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조 씨에게 삼일빌딩을 특혜 매각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남경필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2002년 3월 “조풍언 씨는 김대중 대통령 일가와 수십 년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며 “삼일빌딩 등을 헐값으로 인수한 점 등 각종 의혹 사항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당시 윤호중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은 “일일이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연이은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스몰록인베스트먼트는 수십 년간 삼일빌딩을 소유했다가 2018년 이지스자산운용에 1780억 원을 받고 매각했다. 삼일빌딩 인수 주체는 이지스자산운용이 조성한 펀드 ‘이지스전문투자형사모부동산투자신탁178호’였다. SK디앤디가 해당 펀드에 45%를 투자하면서 주요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삼일빌딩은 이지스자산운용에 인수된 후 리모델링을 거쳐 2020년 재개관했다. 재개관 후 SK그룹 계열사인 SK네트웍스, SK매직 등이 삼일빌딩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2021년 NH아문디자산운용에 삼일빌딩을 재매각했다. 매각가는 3940억 원으로 3년 만에 2000억 원 이상의 차익을 거뒀다. 리모델링 비용을 감안해도 상당한 수익을 거둔 셈이다. 다만 SK네트웍스 등 SK그룹 계열사들은 건물주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삼일빌딩에 본사를 두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어지간한 건물도 30층을 넘기면서 삼일빌딩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일부 음식점을 제외하면 사무실로만 사용돼 외부인이 출입할 일도 많지 않다. 하지만 한국인이 설계를 맡은 한국 최초의 마천루라는 점에서 삼일빌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8년 ‘김중업 다이얼로그’를 개최하면서 삼일빌딩에 대해 “31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 굉장히 새로운 도전이었다”며 “삼일빌딩은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서울의 위상을 상징하는 당시 최고층 건축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