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멘은 2014국제아이스하키대회가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5선을 위한 정치적 쇼라며 대회 반대 시위를 벌였다. 로이터/뉴시스 |
지난 4일 푸틴 부부가 투표를 마치고 투표소를 나선 직후 투표소 안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젖가슴을 드러낸 세 명의 여성들이 나타나 투표함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이들은 모두 ‘푸틴은 도둑놈’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가슴과 등에는 페인트로 ‘크렘린의 쥐새끼’ ‘세 번째 도둑질’ 등 푸틴의 3선을 비난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출동한 경찰과 경비원들에게 제지당한 이 여성들은 곧 바깥으로 끌려 나갔으며, 한바탕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 무모한 여성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피멘’의 회원들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피멘’의 가장 큰 특징은 ‘알몸 시위’다.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낸 채 시위를 벌이는 이들의 목표는 앞으로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영향력 있는 여성인권단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지난 2008년 키예프에서 안나 그조르(28)라는 여성이 처음 설립한 ‘피멘’은 현재 300여 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1만 5000명가량의 지지자들을 두고 있다. 회원 대다수는 18~20세의 여대생들이지만 남성 회원들도 소수 활동하고 있다. 회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알몸 시위에 참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알몸 시위는 20명 정도만 참가하고 있으며, 나머지 회원들은 티셔츠를 입은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처음 단체를 결성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그조르는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성행하는 ‘섹스 관광’과 ‘성매매’를 반대하기 위해서 시위를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는 남성중심 사회며, 여성들은 수동적인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심각한 성차별 때문에 여성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구하기 힘들 정도”라며 “대부분은 무직인 상태로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런 여성들을 보호해주는 곳이 아무 곳도 없다는 데 분노를 느꼈던 그조르는 “사회의 약자인 여성들을 위해 대신 행동할 필요성을 느꼈다”면서 ‘피멘’을 설립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노출 시위를 벌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속옷만 입고 시위를 하다가 2009년 8월, 회원 가운데 한 명인 옥사나 샤치코가 키예프에서 처음 토플리스 시위를 벌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계속 이어진 반라 시위는 어느새 ‘피멘’을 상징하는 특징이 됐고, 오늘날 적지 않은 관심을 받는 여성단체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현재 ‘피멘’은 여성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탈정치와 탈종교를 지향한다”는 주장대로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관련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 로마, 다보스, 파리, 취리히,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활동 지역도 계속해서 넓혀가고 있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가슴을 노출한 채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여성 운전 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자동차 시위를 벌였는가 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벌어졌던 지난해 3월에는 일본인들의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이른바 ‘누드 사무라이 운동’이라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2월 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 반대 시위나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반대 시위는 각국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 보도되기도 했다.
▲ ‘반푸틴 운동’ 중 경찰에 제지당하는 모습. 로이터/뉴시스 |
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우크라이나에서 매매춘은 엄연히 불법이건만 정부관리들은 나서서 단속을 하기는커녕 포주들로부터 뒷돈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매매춘이 엄청난 외화벌이가 된다는 점도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는 이유다. 알려진 바로는 우크라이나의 매춘 산업은 연 7억 5000만 달러(약 1조 1000억 원)의 수익을 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경제의 ‘효녀 산업’인 셈이다.
현재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유럽과 미국의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는 그야말로 섹스 관광 천국이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 설령 걸린다 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매매춘을 하다가 적발될 경우에도 벌금은 고작 5유로(약 7400원)에 불과하다.
이런 까닭에 우크라이나 중심가부터 교외까지 사창가들이 즐비하며,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들을 붙잡고 매춘을 제안하는 관광객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이와 같은 비참한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피멘’은 이와 관련, 오는 6월부터 폴란드와 공동으로 개최될 ‘유로 2012’ 축구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매매춘 행위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강력한 법조항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성행하고 있는 매매춘이 유럽 각지에서 축구팬들이 몰려오면 더욱 성행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반라 시위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도대체 가슴을 보여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꼭 그렇게 선정적으로 시위를 해야 하는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시위가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인 ‘에로틱쇼’라고 치부한다. 또한 노골적이고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이들이 혹시 마약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멘’은 이런 비난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시위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이 가슴을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피멘’ 회원인 알렉산드라 셰브첸코는 “우리가 옷을 벗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노출은 정당행위다”라고 말했다. 그조르 역시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저 피켓을 들고 평범하게 시위를 한다면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조르는 알몸 시위가 과연 여성해방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기존의 페미니스트들과 다르다. 우리는 그들처럼 남성에게 지지 않으려고 경쟁을 하거나 혹은 그들을 따라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을, 그리고 여성스러움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당당하다 해도 길거리에서 노출을 하면서 겪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어떤 점이 가장 힘드냐는 질문에 회원들 다수는 “활동을 시작한 후 가족들과 멀어졌다”는 점을 꼽았다. 17세 때부터 활동을 시작한 셰브첸코는 처음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며칠간 자신을 집에 가두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해지는 정부와 비밀경찰의 협박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집안까지 들어와 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조르는 “비밀경찰이 한밤중에 아파트로 찾아와서는 시위를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안 그러면 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말했다”고 폭로했다.
실제 ‘피멘’ 회원 세 명이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납치된 사건도 있었다. 2010년 무려 80%에 가까운 득표율로 4선에 성공한 루카셴코 대통령의 재선 1주년 기념일에 반대 시위를 벌이던 회원 세 명이 러시아비밀경찰(KGB)로 추정되는 무리에 의해 연행된 후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실종된 다음 날 나타난 이들은 “KGB 요원들이 우리를 숲 속으로 끌고 가서는 구타했다. 그리고 옷을 벗기고는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몸에 불을 붙이겠다고 협박했다.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휴대폰, 신분증, 현금을 모두 빼앗긴 채 숲 속에 버려진 이들은 가까스로 인근 마을에 도착한 후에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에는 차츰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의회의 여성의원 비율이 8%로 올라간 것이 한 예다. 또한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오히려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이들을 모방한 단체도 등장했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결성된 ‘RU FEMEN’이 그것이다.
“우리는 여자 ‘로빈 후드’다”라고 말하는 그조르의 말처럼 과연 이들의 목소리가 앞으로 계속 진지하게 울릴지 지켜볼 일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