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세월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바윗덩어리가 풍화돼서 그것이 어디 흘러가서 미세한 분말로 축적이 돼서 저한테 오기까지는 몇억 년이 걸렸을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서 제 앞에 온 이런 인연들을 생각해 보면 대단히 고마운 거죠."
경기도 여주시. 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의 안금리 마을. 이곳에서 최창석 씨(62)는 '그릇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직접 농사를 짓는 건 아니지만 그릇을 빚을 때의 마음가짐이 농부가 정성스레 농사를 짓는 마음과 같다는 최창석 씨. 생계를 위해 우연히 들어선 길인데 자신과 베짱이 맞더라고 말하는 그는 35년째 도예의 길을 걷고 있다.
깊어지는 가을 최창석 씨의 발걸음은 수시로 들판과 산으로 향한다. 최창석 씨에게는 볏짚과 흙을 찾아다니는 게 일상이다. 볏짚을 태운 재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인 '회령 자기'를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최창석 씨. 흙은 기본이고 그의 도자기를 이루는 것 중엔 무엇 하나 자연이 아닌 것이 없다.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라 말하는 최창석 씨는 자연이 허락한 재료로 자연을 빚으며 무심으로 평안하고 행복하다.
월동준비가 한창인 안금리 마을. 최창석 씨도 이웃집 김장을 거들기 위해 앞치마를 맸다. 귀농 후 유기농으로 농사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농작물을 나눠주고 있는 이웃집 내외는 사람도 품 넓은 자연을 닮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이들이다.
최창석 씨에게 도예를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최창석 씨를 도자기를 닮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얽매이는 것보다는 자유스러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만들었던 옛 선조들의 심성을 생각해보면 자연과 위배되는 삶일 수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최창석 씨.
그는 자신 역시 얽매임 없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그러한 삶이 도자기에 그대로 투영되길 바란다.
사위가 조용해진 밤 최창석 씨가 물레 앞에 자리를 잡는다. 고요히 흙을 만지며 일상의 시름을 잊고 오롯이 작업에만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다. 수십 년간 사람의 살결같이 말랑말랑한 흙을 대해오며 강퍅했던 자신도 많이 순해지더라는 최창석 씨.
하지만 도예가의 길이 늘 평탄치만은 않았다. 연년생인 자식들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 최창석 씨는 생계를 위해 도예와 다른 일을 병행하기도 했지만 성정에 맞지 않아 괴로운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이 안 될 때면 억지로 하지 않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그냥 기타 치며 논다는 최창석 씨.
그러다 보면 다시 물레 앞에 앉을 힘이 난단다. 윤택한 삶을 누리려 애쓰지 않고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최창석 씨는 그렇게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살아간다.
볏짚 유약을 바른 도자기들을 가마에 하나하나 채워 넣는 최창석 씨. 수개월 동안 정성 들여 작업한 것들을 가마 안에 넣을 때면 도자기가 모두 살아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도자기는 가마 안에서 1,400도를 넘는 고열을 견디며 마지막 ‘불의 강’을 건너는 동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가마 앞에 앉아 하루 꼬박 불을 때며 가마 곁을 지킬 때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부유한다. 수행자처럼 그런 자신을 지켜보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새 35년이다.
처음 몇 년 동안은 가마의 문을 여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는 최창석 씨.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살아가며 수많은 곡절을 겪듯 수없이 경험한 실패도 그저 살아가는 과정의 하나이고 이야기일 뿐이라며 무심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최창석 씨는 그렇게 순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빚으며 자유롭게, 삶의 깊이를 더해간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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