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대 대선을 하루 앞둔 1987년 12월 15일 김포공항. 김현희(일본 가명 하치야 마유미)가 마우스피스를 물고 입에 흰 반창고를 붙인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고 있다. 오른쪽이 국정원 최초 여수사관 최창아 씨. 사진출처=보도사진연감 |
안기부는 경찰과 협조하여 일본인 두 남녀, 마유미와 신이치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국경찰에 보내줄 것을 인터폴 142개 회원국에 긴급 요청했다. 인터폴의 협조에 의해 마유미와 신이치에 대해 조금씩 중요한 정보가 입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방국이 아닌 바레인이 얼마나 협조해 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안기부 수사관의 입국을 거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기부와 외교부의 집요한 노력으로 결국 마유미는 한국으로 인도되었다. 이는 항공기 테러사건 사상 처음으로 범인의 국적과 관계없이 피해국이 범죄인을 인도받은 것은 국제 외교사상 처음 있는 일로 민간항공의 안전에 있어서도 이정표가 되었다고 높게 평가받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작이니 하는 마당에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그 시시비비를 밝히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큰 사건의 중심에서 긴 시간을 지내왔던 나로서 한 번쯤 뒤돌아봐도 괜찮을 시기가 된 것 같았다. 그저 내가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적고 싶고, 판단은 읽은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기억을 되새기며 한자 한자 적으면서 오히려 어떻게 이런 상황이었는데 조작이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사건 발생 당시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그래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높아진 것은 88 서울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였다. 그런데 87년 아직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인터폴과 세계 각국을 끌어들이면서까지 조작극을 꾸밀 수 있었을까. 사건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나는 조작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조작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싶다.
당시 일본도 겉으로는 KAL기 사건에 일본인이 직접 간여했다는 정보는 없다고 말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비록 위조여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이들이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인 행세를 했기 때문에 일본인이 간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여 출입국 상황에 대한 체크나 관련 주변인물에 대한 신상파악 등에도 지나치게 신중을 기했다.
그럼에도 사건발생 직후 바레인은 일부 일본여행자들에 대해 관례적으로 발급해온 72시간 체류비자 발급을 거부하였고 JAL항공은 일본인들이 미리 발급된 비자 없이는 바레인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돌리기까지 했다. 더욱이 나중에 김현희의 자백에 의해 그녀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선생이 납치된 일본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과 북한이 치열한 외교전에 휘말리는 결과가 되었다.
안기부의 조사는 수월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12월 4일 바레인으로부터 신이치와 마유미의 지문을 넘겨받아 경찰과 공조하여 350명에 가까운 감식과 직원들이 철야로 내국인과의 대조작업을 벌였으나 아무도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내국인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실 내국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추측대로 이들이 조총련이나 북한공작원이 분명해 보였으나 입증할 만한 단서가 없었을 뿐이었다.
바레인 당국도 마유미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했다. 마유미는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었으나 다행히 중상이 아니었다.
“나는 중국인이다.”
바레인 경찰의 조사가 계속되자 마유미는 북한에 우호적인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중국은 우리와 수교를 맺기 전이라 중국 공산 정권이 협조를 해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마유미는 자신이 흑룡강 성 출신의 백취혜(百翠惠)이며 마카오에서 신이치를 만났다고 했다. 그녀는 신이치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의 가사 일을 도우며 함께 살다가 여행을 같이 하자는 신이치의 제의를 따라 바레인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KAL기를 추락시킨 것이 아닌가?”
바레인 경찰은 당혹스러워하면서 마유미를 신문했다. 그러나 마유미는 KAL기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여 신문이 어려웠다. 영국인이면서 바레인 CID 대장인 핸더슨은 더 이상의 신문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바레인 정부에 한국으로 그녀의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건의했다. 바레인 국적기나 바레인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면 조사가 더욱 치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나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이 너무나 온순하게 이루어졌다. 고도의 공작원 훈련을 받은 마유미로부터 어떤 자백도 받을 수 없었다.
▲ 2009년 김현희가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와 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다구치 야에코 씨는 김 씨가 북한에 있을 당시 김 씨의 일본어 교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마유미가 자해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
수사국장의 지시에 우리 요원들은 여러 의견을 제시했다.
“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환자들이 사용하는 깁스 같은 것을 착용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권투 선수들이 사용하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려야 돼요.”
요원들이 낸 의견들이었다.
“좋아. 당장 그 장비들을 구입해.”
수사국장의 지시에 의해 나는 동료 요원들과 광화문 일대 의료기구 파는 곳을 돌아 다녔다. 우리는 장비의 용도를 살피기 위해 직접 착용을 해본 뒤에 그중 몇 가지를 구입했다. 이 중 플라스틱 마우스피스는 나중에 마유미를 바레인 경찰로부터 인수받자마자 입에 물려 반창고로 붙여 두었는데 서울에 도착하여 축 늘어진 채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고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그녀의 모습에 내외신 기자들이 놀라기도 했다.
일본 경찰도 치열하게 수사를 했다. 그들에 의해 마유미와 신이치가 소지한 도쿄 시내 긴자 소재의 저팬 투어리스트클리닉이라는 병원에서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 예방접종증명서(옐로카드)도 확인 결과 의사 서명과 확인 도장이 모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마유미는 점점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기자들의 열화 같은 성화로 인해 바레인 경찰이 마유미의 사진을 공개했다. 안기부 요원인 우리도 신문에서 마유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나는 사진을 본 순간 한동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유미가 상당한 미인이었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치고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에 거의 밀다시피 한 눈썹, 부스스한 파마기의 머리는 도무지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당시 서울의 여자들은 눈썹을 짙게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우리 눈엔 그녀가 일본보다도 동남아 여성처럼 보였다.
“테러리스트 같아 보이지 않네.”
“상당한 미인이잖아? 이런 여자가 폭탄 테러를 했을까?”
신문을 본 한국인들은 놀라서 말했다. 안기부 요원들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훗날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 역시 감탄한 것이 그녀의 코다. 앞모습보다도 옆에서 보는 그녀의 코 선은 처음엔 정말 ‘수술한 거 아냐’ 할 정도로 깨끗하게 잘빠진 모습이었다.
한 국제문제 평론가는 북한에는 10만 명 이상 되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의 대남공작 조직이 있는데 이들 조직에는 모란꽃 소대라 불리는 여성공작원도 다수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북한의 여성 공작원이 전면에 등장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번 사건에 북한 여성 공작원이 관련됐다면 아마 그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유미가 최초의 북한 여자 공작원인가? 나는 안기부 최초의 여자수사관인데….’
나는 기분이 미묘했다. 마유미가 한국으로 인도된다는 것이 결정되자 이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맹렬히 비난한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의 중앙통신은 ‘바레인은 마유미의 한국 인도조치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북한은 KAL기 실종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우연이었을까? 전면에 등장한 첫 번째 북한 여성 공작원과 첫 번째 남한 여성 수사관.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동시에 전 세계에 얼굴을 내놓게 되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