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갈비·팥죽·가맥 로컬 맛집 찾아 골목골목 누벼…눈 오는 날의 카페 투어도 ‘빼놓으면 섭섭’
전주 하면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전주비빔밥이나 막걸리, 한정식 같은 전형적인 음식 말고 이번엔 전주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는 로컬 맛집을 추천받았다. 기차에서 간단히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면서도 다가올 미식의 시간을 기다리는 설렘. 사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고 있는 탓에 기차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삼스레 즐겁다.
#식당과 카페 전전하기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은 40년 넘는 구력의 효자문식당이다. 효자문식당 바로 앞에 수원 백씨 효자장려각이 있어 식당 이름도 효자문식당이 됐다. 효자문식당의 주 메뉴는 불갈비인데 양념이 자박자박한 일반 불고기와 달리 언양불고기처럼 양념 후 바싹 구워낸다.
두툼한 고기에 갈빗대가 붙어있으니 틀림없는 갈비이고 불고기처럼 양념이 배어있는 데다 불에 직접 구워 나오니 불갈비다.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달달한 맛으로 한우 특유의 담백함과 감칠맛이 있고 통마늘이 토핑되어 있어 어른 입맛도 잡는다. 불갈비를 시키면 반 그릇짜리 갈비탕을 시킬 수 있어 배부르지 않게 갈비탕도 맛볼 수 있다. 한우만 사용하기 때문에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추운 날씨에 떨어진 입맛 다시 올리고 싶다면 가볼 만하다.
점심식사 후엔 발길이 자연스럽게 카페로 간다. 커피는 각성제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소화제가 되기도 한다. 직장인이라면 거의 습관화 되다시피 한 ‘식후 커피’의 공식은 여행 와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전주는 볼 것이 그리 많은 도시는 아니다. 한옥마을을 제외하면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신 먹고 마실 것이 차고 넘치게 많다. 그래서 전주에서의 맛집 투어는 몇 날 며칠을 해도 늘 시간이 모자라다. 관광일랑 소화나 시킬 겸 식당과 카페를 오가는 사이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되는 객사나 경기전 등의 유적지로 대신하면 될 일이다.
배부르게 먹고 골목 끝 한옥카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전주는 전국에서 단위면적당 카페가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한다. 카페투어가 전주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다. 마침 눈까지 온다. 요 며칠 전북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렸다. 눈 내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역시 따뜻한 카페에 포근히 들어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창 너머로 바라볼 때다. 눈 나리는 거리를 걷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흔히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함박눈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볼 때 더 아름답다.
골목 구석에 숨어 있듯 자리한 한옥카페에서 눈 오는 풍경을 배경으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와는 또 다른 맛이다. 눈으로는 눈을 한 움큼 담고 입으로는 커피를 마시고 마음은 쿠키와 함께 여유를 달갑게 삼킨다.
직장에선 식당, 카페, 그리고 곧바로 사무실이지만 미식여행을 왔으니 식당과 카페와 분식집과 가맥집, 다시 식당과 카페와 술집을 한량처럼 전전해보자. 누가 뭐랄까. 1년을 열심히 살아온 자가 살짝 누려보는 1박 2일의 소박한 휴식을.
#출출한 오후 4시엔 팥죽을
습관적으로 출출해지는 오후 4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와중에도 어김없이 출출한 간식 시간은 온다. 겨울 간식으로 뜨끈한 팥죽만 한 게 또 있을까. 새알심 동동 뜬 동지팥죽 한 그릇이면 삭막했던 마음도 부드럽게 녹을 것 같다. 전주남부시장 한편에 팥죽과 깨죽을 파는 동래분식이 있다.
커다란 냉면대접 한 가득 담아주는 뜨끈한 옛날 새알팥죽 한 그릇에 7000원, 팥칼국수는 6000원이다. 점심에 한우 불갈비를 먹느라 통 크게 열어뒀던 지갑을 덕분에 다시 얌전하게 오므린다. 깨죽과 깨칼국수를 비롯해 손수제비와 떡만둣국, 칼국수도 있다. 모든 메뉴가 6000~7000원이다. 당연히 국산 팥은 아니겠거니 했지만 주인장이 ‘국산팥’을 사용한다는 말에 한 번 더 놀란다. 팥죽 한 그릇이 뭐 대수냐 하겠지만, 팥죽 한 그릇 잘 먹으니 겨울 하루가 종일 훈훈하다. 흔하게 먹는 맛, 별 것 없는 맛이지만 싸가고 싶은 맛이다.
날은 춥지만 팥죽이 소화될 정도만 걸어볼까. 인근에 객사를 끼고 ‘객리단길’이 있다. 객사(客舍)는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이 전주에 내려왔을 때 묵었던 관사를 말한다. 객사 인근을 전주에선 공식적으로 객사길이라 명칭하고 별명처럼 ‘객리단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전엔 이곳에 전라감영도 있었다. 지금도 이 주변엔 전주시청이 있고 한때는 전라북도청까지 위치했던 터라 전통적으로 전주의 중심지이자 번화가라 할 만하다.
‘○리단길’은 이미 전국의 번화가마다 유행처럼 번져 정착된 이름이다. 서울로 치면 경리단길이 원조지만 명동이나 홍대입구 같은 시내 번화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전주에는 객리단길이 있다. 객리단길에는 맛집과 카페, 개성 넘치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도 이곳에 있다. 객리단길 곳곳을 걷는 재미가 있다.
걷다 보니 날이 저물고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다. 뭘 위해 사는지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대충 때우던 숱한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이번 여행은 시간 맞춰 꼬박꼬박 건강한 밥상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여정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삼시세끼’다. 저녁 메뉴는 주꾸미 샤브샤브. 서울로 치면 광화문격인 풍남문 인근 골목 안에 이름도 정겨운 세은이네가 있다.
무와 파를 가득 넣어 감칠맛 나는 육수에 싱싱한 미나리와 냉이, 배추와 청경채를 넣고 후루룩 끓여내 야채 먼저 건져 먹고 주꾸미는 살짝만 익혀서 바로 건져 야들야들할 때 먹는다. 소주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꾸미를 냄비 안에 너무 오래 넣어두면 질겨지니 주의해야 한다. 주꾸미 색깔이 선분홍빛으로 바뀌면 바로 건져 먹는다. 주꾸미 머리는 식당에서 따로 푹 익혀 내준다. 머리 안에 고소한 맛의 노오란 내장이 그득 들어있어 입맛을 돋운다.
#낭만 반 추억 반, 가맥집
저녁식사를 마치고도 하루의 미식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코스는 전주 가맥집으로의 마실이다. ‘가맥’은 가게맥주의 줄임말로 용돈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나 소시민이 술집엔 가지 못하고 가게에서 과자나 마른안주를 곁들여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던 것에서 이어졌다. 손님들이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다 보니 가게 주인들은 저마다 개성을 살려 계란말이며 황태채 구이 등 간단한 안주를 팔기 시작했고 안주 맛이나 가게 분위기, 주인장의 개성에 따라 인기 가맥집이 생겼다.
가맥은 전주가 원조다. 전주 원도심에는 수많은 가맥집이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전일갑오, 초원슈퍼, 영동슈퍼 등 3대 가맥집도 있다. 어떤 가맥집은 연탄불에 즉석에서 구워주는 황태채가 일품이고, 어떤 집은 소스가 끝내주고, 어떤 가맥집은 닭발튀김을 무료 안주로 내주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사서 편의점 앞 탁자에서 먹는 식인데, 이게 남다른 감성으로 느껴지는 시절이 있었다.
가맥집에 직접 가보면 어스름한 불빛의 허름한 동네슈퍼 탁자에 앉아 소박한 안주를 벗 삼아 맥주를 꺼내 먹는 것이 전부다. 그야말로 별 것 없는 것이 별 것인 곳이지만 가맥집에는 그 시절 특유의 낭만을 대변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가맥집은 굳이 레트로를 표방한 적 없지만 요즘처럼 꾸며진 인위적인 레트로가 아니라 진정한 레트로가 된 것처럼 보인다.
미식여행의 하루는 길면서도 짧다. 사람의 배는 요상하게도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게 부르다가도 순식간에 꺼지고, 다시 불러졌다가 또 비워진다. 노포 불갈비를 시작으로 마음까지 뜨끈해지는 새알팥죽으로 출출함을 달랬다. 찾기도 힘든 골목 구석의 주꾸미 샤브샤브로 훌륭한 저녁을 채우고, 레트로 가맥의 황태구이까지 하루를 배부르게 마쳤다.
그러고도 다음날 계속 이어진 미식여행에서는 남부시장 콩나물국밥으로 오랜만에 아침상을 받고, 가야금과 대금 연주를 들으며 황송한 쌍화차를 마셨다. 로컬 맛집에서의 복어탕을 끝으로 1박 2일의 촘촘한 미식여행을 마무리했다. 겨울잠을 못잘 바에야 겨울밥상이라도 든든하게 받아보자는 심산으로 시작했던 미식여행. 전주는 그야말로 미식여행에 ‘제격’이었다.
전주=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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