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삼성병원 진료부원장을 역임한 오태윤 흉부외과 교수는 2021년 7월 임명된 신현철 병원장(신경외과 교수)에 대한 임명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오태윤 교수는 “의료법인 삼성의료재단 이사회 의결 없이 이사장이 병원장을 선임했다”며 “당연히 병원장 임명 관련 회의록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12월 19일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병원장 직무집행정지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병원장 임명 무효 소송 등과 관련해 신현철 강북삼성병원 병원장 입장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전화 연락했다. 하지만 신 원장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강북삼성병원 측은 “강북삼성병원은 내부 규정에 따라 병원장 임명 절차를 진행했다”고만 밝혔다.
삼성그룹이 소유한 삼성병원은 강북삼성병원, 삼성서울병원, 삼성창원병원 등 세 곳. 그런데 이들 삼성병원 안팎에서 요즘 “강북삼성병원 병원장 관련 소송은 비단 강북삼성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인이 아닌 전문경영인 체제 11년 동안 삼성병원 세 곳 전체에서 곪았던 문제들이 표출된 사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11년 동안 강북삼성병원을 비롯한 삼성병원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요신문은 복수의 삼성병원 관계자를 통해 삼성병원 담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병원 내 비밀 아닌 비밀들”을 들어봤다.
우선 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삼성창원병원 등 삼성병원 조직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삼성병원 조직은 다른 대형 병원들과 비교해 독특하다. 하나의 의료법인이 여러 병원을 총괄하는 다른 대형 병원 조직과 다르다. 서울아산병원 등 전국 7개 아산병원은 ‘아산복지재단’이,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3개 세브란스병원은 ‘학교법인 연세의료원’이 운영한다. 하나의 재단이나 법인이 병원 전체를 운영하는 구조다.
하지만 삼성병원 세 곳은 각각 다른 재단이 운영하는 독립체제다. 각각의 의료법인이 있다는 얘기다. 강북삼성병원 같은 경우 ‘의료법인 삼성의료재단’이 운영한다.
삼성병원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삼성그룹은 2008년 7월 삼성의료원장 제도를 도입했다. 병원장 임명 무효 소송을 제기한 오태윤 강북삼성병원 교수는 “삼성의료원장 체제는 독립된 세 개의 공익재단, 의료재단, 학교법인 산하에 있는 삼성병원 세 곳을 총괄하는 기형적인 구조였다”고 말한다. 당시 삼성의료원장 자리가 신설되면서 이사회 정관도 개정됐다. 이사회 의결로 정하던 삼성병원 세 곳의 병원장은 삼성의료원장 추천을 받아 재단 이사장이 선임하도록 변경한 것이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종철 삼성의료원장은 실질적으로 삼성 병원 세 곳을 통할했다. 당시 삼성병원 안팎에선 “마치 연세대 의료원장이 고려대 의료원장을 겸임하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고 한다. 각 병원 교수들 사이에선 ‘삼성의료원장=위인설관(爲人設官·사람을 위해 일부러 벼슬자리 마련), 옥상옥’이란 지적이 나돌기도 했다고.
그러던 차에 2011년 삼성서울병원이 다른 대형 병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외부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에 이건희 삼성 회장은 대대적인 경영진단과 감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로 삼성의료원장 자리를 없앴다.
그러면서 삼성은 “병원 경영을 의료인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맡긴다”는 방침을 세웠다. 삼성서울병원에 삼성전자 소속인 ‘의료사업 일류화 추진단(의료 추진단)’을 두고 윤순봉 삼성석유화학 대표이사를 추진단장으로 임명했다. 윤순봉 추진단장은 삼성그룹에서 요직으로 통하는 삼성생명공익재단 대표이사를 겸임했으며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사장도 맡았다. 직함이 세 개였다. 삼성서울병원뿐 아니라 강북삼성병원, 삼성창원병원 등도 통할했다. 삼성은 실질적으로 추진단장에게 병원장들 임명부터 급여·상여금 결정, 재무·회계 관리, 신사업 투자 등 삼성의료원장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당시 삼성병원 안팎에선 “그룹이 국내 최초로 비의료인인 전문경영인을 삼성병원에 파견했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
이후 성인희 삼성정밀화학 대표이사와 그룹 미래전략실 출신 임영빈 삼성생명 고문 등이 삼성생명공익재단 대표이사와 추진단장, 삼성서울병원 지원총괄사장 등을 겸임하며 삼성 병원 세 곳을 운영했다.
그런데 추진단장을 겸임한 임영빈 대표이사가 지난 12월 13일 갑작스레 사임했다. 삼성그룹 인사가 마무리된 시점이어서 그룹과 병원 안팎에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그룹 차원에서 강북삼성병원 병원장 임명 무효 소송과 삼성창원병원 병원장 인사에 대한 내부 반발 등으로 문책성 인사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임 대표 후임으론 곧바로 한승환 삼성물산 리조트부문 대표이사가 선임됐다.
삼성병원 내부에선 병원장들이 특정 대학 출신로만 선임되는 것에 대한 불만도 나오고 있다. 삼성병원 고위 관계자는 “의료 추진단 체제 이후 세 병원 병원장이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임명됐고 병원 내부에선 그들만의 카르텔까지 형성됐다”며 “삼성창원병원 교수들은 삼성창원병원 병원장을 계속 서울에서 낙하산처럼 내리꽂는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삼성창원병원 관계자는 “지난 2월 삼성창원병원 병원장으로 고광철 삼성서울병원 내과 교수가 왔는데 창원병원 사람들 분노가 극에 달했다. 병원 내부에서 연판장이 돌았고 유능한 교수들이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시 임영빈 대표이사는 병원 관계자들에게 ‘이번이 병원장 낙하산 인사 마지막’이라는 식으로 달래며 겨우 진정시켰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삼성창원병원 병원장 임명 과정에서의 내부 반발이 임영빈 대표이사 사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관측이다.
삼성서울병원 조직도에 따르면 의료 추진단장은 병원장과 같은 직급이다. 하지만 실제론 삼성생명공익재단 대표이사로서 삼성서울병원 이사와 병원장을 결정한다. 또 강북삼성병원 이사장과 이사, 병원장 그리고 삼성창원병원 병원장 임명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권자다. 최근 삼성병원 안팎에선 “의료인도 아닌 비의료인 추진단장이 삼성병원을 운영하는 건 의료법 위반 소지가 매우 높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삼성병원 관계자들은 결국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나서야 병원 내부 갈등과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20년 이상 삼성병원에 재직한 한 교수는 “이병철·이건희 회장과 달리 이재용 회장에게선 의료 사업에 대한 철학을 찾아볼 수가 없다”며 “이재용 회장이 한 번이라도 의료 사업에 대한 철학을 갖고 세심히 들여다봤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 11년인데 이젠 총체적으로 한 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삼성병원 의사 고백 “실적 압박 때문에 암환자한테 다른 병원 가라 못해”
“삼성그룹이 소유한 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삼성창원병원 등 세 곳이 2011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후 의료진이 받는 경영 실적 압박도 커졌다”고 하소연하는 의료인이 적지 않다.
입원과 외래환자 증가, 수술 건수 증가, 과잉 검사와 과잉 진료 등으로 받는 경영 실적 압박은 일상사. 삼성병원 경영 상태를 잘 아는 인사는 “1994년 삼성의료원이 처음 설립됐을 땐 촌지 없는 병원, 보호자 없는 병원, 최고 시설과 의료 서비스 등으로 그야말로 비영리 의료사업의 획기적인 모범을 보였다”며 “그러나 전문경영인이 그룹에서 파견된 2011년 이후부턴 의료 실적 향상, 경영 지표 달성에 목을 매는 형국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 삼성병원의 한 의사는 “지방에 사는 환자가 새벽에 기차 타고 올라와 몇 시간 기다려 단 1~2분 의사 진료를 받은 다음 또 다시 검사받고 다른 과(科)의 협진 진료도 받고 집에 돌아가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MRI 검사 대기가 한두 달은 예사이고 심지어 암환자 수술 대기가 두세 달이니 의료인 양심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병원 수입을 위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안내하지도 못 한다. 의료진뿐 아니라 환자, 보호자도 지치지 않을 수 없는 치열한 경쟁 구조에 내몰리고 있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이 의사는 “소신껏 진료해야 하는 의사들이 경영 목표, 실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라며 씁쓸해했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