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순형 의원이 총선 불출마와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2007년 대선 출마 당시 <일요신문> 인터뷰 모습.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노장’의 은퇴선언은 달랑 보도자료 한 장이었다. 격정적인 멘트도 그 어떤 회한도 담겨 있지 않았다.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계 은퇴의사를 밝히는 기자회견 문구를 한 소절 한 소절 직접 작성한 자유선진당 조순형 의원(77)의 시선은 이미 세속의 여의도가 아닌 초야를 바라보고 있을 듯했다. 지난 3월 21일 조 의원의 ‘뜻밖의’ 정계 은퇴 소식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전해져 왔다.
자유선진당으로부터 서울 중구에 전략공천되었던 조 의원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후보직에서 사퇴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현역 최다선인 7선을 기록한 조순형 의원의 인생은 그대로가 한국 정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짧지 않았던 정치 인생엔 적지 않은 부침도 있었지만 숱한 정치인들이 비리에 연루돼 배지를 반납하거나 얼룩진 선거전을 치러왔던 점을 감안하면, 총선을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의 그의 정계 은퇴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화려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정계 은퇴 선언이었지만 많은 정치권 인사들은 조 의원의 은퇴 선언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올바르지 못한 일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조순형 의원의 정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조순형 의원이 총선 출마 선언을 한 것은 지난 3월 15일이었다. 이어 21일 후보직 사퇴와 함께 정계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은 그로부터 불과 6일 만이었다. 조 의원의 후보 사퇴 결심은 갑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는 총선 불출마와 정계 은퇴에 대한 결심을 진작부터 해왔다고 한다. 15일 총선 출마 기자회견 당시에도 조 의원은 “많은 고민과 번민 끝에 내린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18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7선에 이르는 의정 생활을 접기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고 출마 결심이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조 의원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박석진 보좌관은 “(조 의원은) 이미 총선 불출마에 대한 생각을 해오다가 당으로부터 출마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뜻을 접었었다. 그러나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서울 중구가 정치 2세들의 대결구도로만 부각되는 것을 보고 불출마 결심을 굳히신 것 같다. 나 역시도 의원께 불출마하시는 게 맞는 것 같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조 의원이 밝힌 사퇴의 이유 역시 “서울의 중심에서 3당 대결구도를 형성해 제3당 진출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전 언론이 일제히 정치가문 2세 정치인의 대결이라고 보도하면서 이런 취지가 실종됐다”는 것이었다. 서울 중구는 6선을 지낸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의 아들인 정진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새누리당 후보), 5선을 지낸 정대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아들이자 8선 의원 정일형 박사의 손자인 정호준 전 청와대 행정관(민주통합당 후보), 그리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기도 했던 조병옥 박사의 아들 조순형 의원(자유선진당 후보)이 맞붙게 되며 주목받은 지역이었다. 이미 7선 의원을 지낸 조순형 의원 입장에서 정치 명가의 자제들 간의 대결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점이 그리 편치만은 않은 일일 터였다. 조 의원 역시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물러나며 “정호준 민주통합당 후보의 아버지인 정대철 전 의원과는 야당 동지로 동고동락했다”며 남다른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정치 이전에 사람의 도리가 앞선다고 믿으며 살아온 만큼 연장자인 제가 물러서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 2004년 3월 당 대표 시절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7년 7월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9년 4월 당시 한승수 총리에게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조 의원을 정계에 입문시킨 것은 그의 형 조윤형.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중진이었던 형을 탄압하자 동생에게 출마를 권유했던 것. 당시 조순형 의원은 서울 성북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서울지역 무소속으로는 유일하게 1위로 당선됐다. 하지만 그 이후 조 의원은 통일민주당, 한겨레민주당, ‘꼬마’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등 16년 동안 야당만을 거치다가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여당 의원 신분이 된다.
조순형 의원 하면 떠오르는 일 중 대표적인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는 점이기도 하다. 그에겐 아픈 일이기도 했다. 조 의원은 2002년 대선에서 많은 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기지만 꿋꿋하게 당을 지키고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지만, 2004년 3월 민주당 대표로서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주도하며 그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낙마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조 의원은 자진해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수성갑)에 출마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 조 의원은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물론 괴로운 순간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다만 내가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국회활동을 하면서 아무런 미련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있다. (탄핵운동 당시) 다섯 번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내가 이대로 정계에서 은퇴한다고 해도 충분히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당시 탄핵에 참여했던 동지들 모두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지만 이후에 그 젊은 친구들이 탄핵역풍으로 인해 국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괴로웠다.”
지난 2006년 7월 성북 을 보궐선거에 당선되며 조 의원은 17대 총선 낙선 뒤 2년 만에 화려한 복귀를 하게 된다. 선거 2~3주 전까지만 해도 지지율이 상대후보에 비해 한참 낮았다가 역전승을 거두었던 그는 당시 “왕조시대에 임금에게 직언을 했다가 유배된 뒤 해제되어 돌아온 선비의 심정”이라는 당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다선의 국회의원으로 살아왔지만 ‘대선 출마 요구’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를 이끌 만한 능력이나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그도 지난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하게 된다. 당시 많은 고민을 했던 듯 그는 기자에게 “민주당에서도 대선 주자가 서너 분이 계시고 다들 훌륭한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주당의 당세가 약해진 까닭이다. 내 일신상의 생각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속내를 털어놓았었다. 그의 출마 선언에 대해 한나라당에서도 ‘제대로 자격을 갖춘 후보가 나왔다’고 공식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경선에서 조직력을 앞세운 이인제 후보에게 밀려 중도사퇴한 뒤 11월엔 민주당과 민주신당의 합당에 반대하며 탈당을 감행하게 된다. 당의 복당 요청과 한나라당 입당설 등을 뒤로 하고 이듬해 2월엔 이회창 대표가 이끌던 자유선진당에 입당한다. 그의 자유선진당 행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실망감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조 의원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견제할 건강한 야당을 만들기 위해 자유선진당 합류를 결정했다”는 입당의 변을 밝혔다. 당시 조 의원의 입당과 심대평 대표가 이끌던 국민중심당과의 통합으로 자유선진당은 8석을 보유하게 되었고 조 의원은 이후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다.
하지만 자유선진당은 ‘제3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18대 국회에서 당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드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조 의원은 이번 출마 선언 당시에도 “양당 패권 정치를 바로 잡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제3 대안정당의 육성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자유선진당을 대안정당으로 적극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자유선진당 역시 총선 공천 파동을 심각히 겪고 있는 상태. 이회창 전 대표 역시 공천 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조순형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21일 명예선거대책위원장 사퇴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미 당내에선 이회창 전 대표와 심대평 대표 간의 불화가 심각해져 총선 이후 결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아쉽게도 마지막 바람인 ‘제3정당’의 힘은 세우지 못했으나 조 의원이 치열한 정치 무대에서 내려오는 뒷모습은 공천 파동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여느 중진 의원들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산을 잘 오른 만큼 잘 내려가고 싶다’는 어느 명배우의 말처럼 조순형 의원은 ‘은퇴의 정석’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남편이 참 자랑스러워”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조순형 의원이 총선 출마를 했다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총선에 안 나가기로 결정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에서 중구에 공천했다고 먼저 발표를 한 것이다. (자유선진당에서) 비례대표로 있었기 때문에 선진당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무작정 안 나간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했고,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도리를 우선해 판단했다. 당에서 결정한 일이었고… 현역인 나경원 씨가 있으니까 다른 당에서 모두 공천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공천이 정해지고, 사실이긴 하지만 언론에서 ‘정치인 2세’의 대결로 흥미 위주로 몰아가는 것이 좀 그랬다. 우습지 않나. 이미 7선 의원인데 말이다. 내 생각에도 그만큼 ‘제3당’에 대한 의견도 피력했고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그냥 처음 생각했던 대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본인도 고민을 하고 있던 데다 내가 아주 강력하게 얘기했다.
―불출마 기자회견문을 보며 마음이 어떠했는지.
▲우린 남편은 평생 그런 걸 누가 써주는 법이 없다. 이번 기자회견문도 본인이 직접 쓴 건데 내가 보니까 너무 감상적인 것 같아서…(웃음).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담담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나와 또 다를 테니까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 문구가 괜찮았는지 여러 분들한테서 격려 전화와 문자를 받았다. ‘아, 그래도 우리 남편이 국회의원 생활을 꽤 잘했구나’ 싶더라. 남편이 참 자랑스럽다.
―30여 년 남편의 정치인생을 함께 걸어오며 기억나는 순간들은.
▲처음 정치 시작할 때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전두환 독재 시절에 그에 대한 저항으로 출마해 온 민주세력이 전부 힘을 합쳐 당선됐고, 13대 때 떨어졌을 때도 양김 씨의 후보단일화가 무산된 것에 대한 저항으로 불이익을 감수하고 한겨레민주당으로 출마했었다. 그때 다들 같이 간다고 했다가 빠져서 혼자 유일하게 현역으로 나갔었다. 또 기억나는 선거는 (17대 때) 대구에 출마했을 때다. 누군들 그렇게 하겠느냐. 그때도 난 올바른 결정이라고 흔쾌히 찬성했었다. 이번에도 출마한 것에 대해서는 나쁜 것 같진 않다. 제3당이 있어야 된다는 남편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래도 가장 알려진 남편이 이 점을 주장했던 건 맞는 것 같고, 결국엔 후보 등록하기 전에 사람이 정치를 하는 거고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며 사퇴한 점 역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다(웃음). 그저 정치인으로서 올바르게 살기만을 바랐고 남편이 그래왔기 때문에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