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쇄원은 조경을 한 게 아니라 시경(詩景)을 했다. 자연풍경을 승화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그 질서 속에는 중국과 일본과 서구에서는 찾기 힘든 시적 정원의 조화가 있다. 사진제공=담양군청 |
이 별서의 주인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였다. 1519년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을묘사화로 유배되어 사약을 먹고 죽자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벼슬에 대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17세에 새로운 과거제도인 현량과에 합격했던 그였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인데, ‘정원의 아름다움’과 ‘벼슬을 등진 낙향’이 묘하게 겹쳐진다.
소쇄원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소쇄원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긴 담이다. 특이한 것은 이 담에 정원을 노래한 시(詩) 48수가 붙여졌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조담방욕(槽潭放浴,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을 잠시 떠올려 보자.
조담의 물 맑고 깊어 바닥이 보이네
목욕을 마쳐도 푸르러 맑디맑네
믿지 못할 것 인간 세상이니
찌는 여름날 다리에 먼지나 씻자구나
정원을 묘사한 시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별서의 독특한 정원 양식 때문이다. 조선시대 별서를 만든 사람들은 정원을 만드는 일이 시를 짓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닌, 시적 운치가 감도는 풍경을 만들었다. 보기 위한 정원이 아니고, 시를 노래하기 위한 장소였다. <소쇄원사십팔영>을 비롯해, <어부사시사>, <다산화사>, <경정잡영> 등 정원을 세세하게 노래한 글들이 많이 전해지는 까닭이다. 그냥 조경(造景)이 아니라 시적 조경(詩的 造景)이니 시경(詩景)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문화적 문맥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예술은 가장 높은 경지를 시서화(詩書畵)의 일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수화가 그림으로 끝나지 않고, 시를 곁들인 것도 그런 연유다.
<풍경을 담은 그릇, 정원>(서해문집)을 쓴 박정욱 박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시경(詩景)은 조경보다 더 높이 바라보고자 한 조선의 독창적인 조원법으로 자연뿐만 아니라 화(畵), 문(文), 악(樂), 무(舞) 등이 모두 조화되는 형식을 추구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석정(石庭)이나, 중국의 석림(石林)처럼 자연물을 가지고 인공적인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시적 형식을 집어넣고, 시적 맥락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8쪽)
▲ 제월당에서 바라본 소쇄원 전경. |
▲ 광풍각. |
대봉대 공간은 소쇄원 입구에서 담을 따라서 오곡문까지다. 여기서 ‘오곡’은 계류가 갈지자(之)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이다. 작은 연못, 대봉대(봉황이 내려 앉는 곳), 초정, 애양단(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상징) 담장을 볼 수 있다.
계류공간에서는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를 감상할 수 있다. 오곡문 옆을 지나온 계곡물이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일부의 계곡물은 구멍이 파진 통나무를 지나 연못으로 모이고, 넘친 물은 수차를 돌리며 계곡으로 떨어진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룬 정원이다. 자연폭포와 인공폭포가 오묘하다. 보길도의 부용동원림도 그런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 광풍각은 사랑채이고, 제월당은 주인이 기거하며 소쇄원을 경영하였을 안채다.
소쇄원은 조경을 한 게 아니라 시경(詩景)을 했다. 자연풍경을 승화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그 질서 속에는 중국과 일본과 서구에서는 찾기 힘든 시적 정원의 조화가 숨겨져 있다. 소쇄원 48영(詠)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조화를 찾아보고 싶다.
평원에 깔려 있는 눈
산에 낀 검은 구름 깨닫지 못하다가
창문 열고 보니 평원엔 눈이 가득
섬돌에도 골고루 흰 눈 널리 깔리어
한적한 집안에 부귀가 찾아들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