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 제기에 “명확한 반대 이유 밝혀야” 지적…스튜어드십코드 강화 두고 정부 입김 작용 관측도
KT는 지난해 12월 28일 자사의 이사회가 구현모 KT 현 대표를 차기 대표이사 최종 후보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KT 측은 “KT 이사회가 구현모 대표의 법적 이슈와 관련한 대표이사 자격 요건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정관과 관련 규정상의 이사 자격요건 등을 고려 시 차기 대표이사직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KT의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내정된 구현모 대표는 오는 3월 정기 주주총회 의결 과정을 거쳐 최종 선임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국민연금은 같은 날 바로 반대 의견을 담은 입장문을 냈다. 국민연금은 KT 지분 10.74%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다. 국민연금은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않다”며 “앞으로 의결권 행사 등 수탁자책임활동 이행 과정에서 이러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국민연금은 앞서 KT, 포스코, 금융지주 등 CEO 선임 과정에서 대주주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은 지난해 12월 27일 국민연금공단 북부지역본부에서 열린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KT, 포스코, 금융지주 등 소유가 분산된 기업의 최고경영자 선임은 투명하고 합리적 기준과 절차에 따라야 이뤄져야 한다”며 “내부와 외부에서 최고 적임자를 찾을 수 있도록 공모 등을 통해 제한 없이 후보자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도 지난해 12월 8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소유분산기업의 대표이사 선임이나 연임 과정에서 현직자 우선심사 등 쟁점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는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의 날선 행보에 KT, 포스코 등 기업들은 난감해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지난 2일 대통령이 참석한 경제계 신년회에 두 기업의 수장이 참석하지 않으면서 국민연금과 두 기업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민연금이 구현모 KT 대표 연임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힌 가운데 3월 다가올 KT 주주총회에서도 구 대표의 연임 여부에 대해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도 2021년 3월 연임에 성공했지만 이후 정권이 바뀐 만큼 교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으며, KT처럼 경영진 연임 논의 시 국민연금의 반대 입장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KT 관계자는 신년회 불참과 관련해 “담당부서가 관련 업무에서 누락해 참여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은 다른 일정이 겹쳐 신년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이 지난해 말 기준 지분 5% 이상 보유한 기업은 264개이며, 10% 이상 보유 기업은 45개다. 국민연금의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가 투자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것) 강화에 국민연금이 주주로 있는 다른 기업들도 국민연금의 행보에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이러한 결정에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3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대해서도 기업가치 훼손 등을 이유로 반대했으며, 2019년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부결시키기도 했다. 김원식 건국대 명예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일이 있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사실상 정부가 하는 셈”이라며 “설사 기업 경영진에 문제가 있더라도 KT 이사회나 공정위 등에서 해야 할 일이지 국민연금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에서 KT 대표 연임을 지지하지 않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에 대해 이유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갑질 문제나 도덕적 문제 등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등의 오해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KT 대표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절차상 문제가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KT는 지난해 상반기 매출 총 12조 5899억 원, 영업이익 1조 858억 원으로 역대 최대실적을 기록했다. 구현모 대표 취임 후에는 AI, 빅데이터, 미디어 금융 등에서 성과를 내고, 영업이익과 매출도 매년 성장하면서 주가가 2배 이상 상승하기도 했다. 구현모 대표의 이러한 성과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연임에 반대의사를 내비친 것은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 발동을 통해 문제가 있는 경영진에 대해 개입을 할 수는 있지만 실적이 좋은 기업의 CEO를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바꾸려 하는 것은 정치적 개입이 있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고갈될 위기에 처했는데 기업 인사 개입에 치중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민연금의 고갈 시기는 2057년으로 예상된다. 또 지난해 초부터 같은 해 10월 말까지 운용 수익률 –5.29%를 기록하며 51조 원가량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인데도 기업 인사에 관여하는 데 힘 쓰고 연금 수익률을 올리는 일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 정권 입김 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보도 설명 자료 이외에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기업 인사 개입이 주가와 기업 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지용 교수는 “상당한 실적이 있는 CEO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히면 경영 안정성 측면에서 주가나 기업가치에도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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