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이야기와 아역부터 성인역까지 ‘구멍’ 없는 배우들…김은숙 작가 자신감엔 이유 있었다
#'등대'같은 길잡이, 송혜교
공개 전 화제성을 먼저 견인한 것은 누가 뭐래도 주연인 송혜교다. 데뷔 후 최대의 연기 변신, 그것도 김은숙 작가와 6년 만에 함께 하는 첫 '복수물'이라는 점에서 공개 전부터 눈길을 끌었던 '더 글로리'는 공개 후 시청자들로부터 다시 한 번 "역시 송혜교"라는 감탄을 이끌어냈다. 이전까지 대중들에게 익숙했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복수자로 변신한 송혜교는 이번 작품이 그의 첫 장르물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만든다.
학창시절, 학교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극을 그린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의 문동은은 마치 등대처럼 꼿꼿이 서서 차가운 복수를 뜨겁게 이뤄 나간다. 로맨스 물에서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온 배우가 사랑이란 감정을 전부 배제한 채 복수만을 향해 건조하고 우직하게 걸어나가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면서 동시에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문동은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현재까지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파트 1의 이야기가 자칫하면 길게 늘어져 시청자들을 지치게 만들 수 있는 전개 방식임에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엔 이 같은 송혜교의 존재감 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중 송혜교의 문동은은 철저한 준비를 거쳐 가해자 5인방보다 우위에 선 상태에서 복수를 시작하게 되지만,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학교폭력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 조금씩 미묘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냉철한 복수자처럼 행동하나 그의 안에 여전히 영혼을 다친 어린 문동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셈이다. 이 작품이 단순한 '사이다 복수'만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휴먼 드라마적인 이야기에도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처럼 섬세하고 미묘하면서도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이 따라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는 송혜교는 단연 '더 글로리'의 등대라 할 법하다.
#'과몰입' 부르는 연기 천재들
학교폭력 가해자 5인방 역시 '더 글로리'의 인기 몰이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빌런에게도 그럴 듯한 서사를 쥐어주며 시청자들이 '대리 용서'하게 만드는 실수를 저질러 왔던 여타 복수물과 달리 '더 글로리'는 이 가해자들을 마음껏 미워할 판을 깔아준다. 동정의 여지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미움 받을 것만을 목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인 데다 배우들까지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를 하고 있으니, 작품에 과몰입하며 기가 빨려버린 시청자들은 송혜교와 가해자 역 배우들이 사이좋게 함께 찍은 비하인드 사진으로 한껏 거칠어진(?) 마음을 달래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작가의 의도와 딱 맞는 맞춤형 연기를 보여준 '연기 천재' 배우들 가운데 이번 작품에서 첫 메인 악역을 맡은 이들이 있어 놀라움을 선사했다. 먼저 문동은에 대한 학교폭력을 진두지휘한 가해자 무리의 리더 박연진 역의 임지연은 죄책감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금수저 가해자의 모습을 그린듯이 연기해 내 시청자들의 공분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냈다. 티 없이 해맑게 웃으면서 악행을 저지르지만 하나 뿐인 딸 예솔(오지율 분)에게만큼은 모성애 넘치는 이중적인 모습을 오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그를 보고 있자면 이번 작품이 첫 악역 도전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 글로리' 이전에 임지연은 로맨스 드라마 '상류사회', '불어라 미풍아' 등을 통해 얼굴을 알렸던 만큼 그를 오래 전부터 봐온 팬들에게도 그의 연기 변신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문동은에게 정신적·성적 폭력을 저지른 두 번째 금수저 가해자이자 무리의 남자 리더인 전재준 역의 박성훈은 공포 영화 '곤지암'에서 곤지암 정신병원의 심령현상을 촬영하는 카메라 담당 성훈 역으로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어 같은 해 KBS2 드라마 '하나뿐인 내 편'에서 장고래 역을 맡으며 안방극장 시청자들에게도 인지도를 높인 그는 tvN 드라마 '싸이코패스 다이어리'에서 살인 기록 속 진범이자 싸이코패스 서인우로 메인 악역의 진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 금수저 가해자인 이사라 역의 김히어라는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2021년부터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특히 대중들에겐 2022년 화제작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탈북 여성 계향심 역으로 특별출연해 잘 알려진 배우다. 이에 앞서서는 tvN 드라마 '배드 앤 크레이지'(2021)에서 마약 조직의 수장이자 모든 사건의 흑막 용 사장 역을 맡아 쉽게 잊을 수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과거엔 전재준의 지시를 받아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을 저지르는 행동대장 노릇을 했고, 현재 시점에서는 문동은이 행하는 복수의 시발점이자 가해자들을 파멸로 몰고 갈 '떡밥'이 된 손명오 역의 김건우는 그의 첫 드라마 주연작인 MBC 드라마 '나쁜 형사'(2018)에서 연쇄살인범 장형민을 연기하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손명오와 마찬가지로 문동은을 직접 괴롭히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지만 제 보신을 위해 친구들을 배신한 최혜정 역의 차주연은 tvN 로맨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에서 남주연 역으로 데뷔한 뒤 주로 멜로와 로맨스 장르에서 활약해 오다 2021년 OCN 오리지널 시리즈 '키마이라'에서 UBS 탐사보도팀 기자 김효경 역을 맡아 범죄 스릴러 장르로도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어 SBS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에서 민국당 대선후보 조태섭(이경영 분)의 미스터리한 수행비서 한지현 역으로 강렬한 결말의 중심축이 되기도 했다.
#'변신'의 또 다른 주역, 정지소·신예은
'더 글로리'가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출연 배우들 가운데 '연기 구멍'이 없다는 데 있다. 이는 성인 역할의 배우들 뿐 아니라 비교적 짧은 시간 등장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상을 남긴 아역 역할의 배우들에도 해당된다. 특히 피해자와 가해자, 문동은의 아역 정지소와 박연진의 아역 신예은은 1화부터 시청자들을 TV 앞에 나란히 앉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 분)과 연교(조여정 분)의 딸 박다혜로 큰 주목을 받았던 정지소는 차기작인 tvN 드라마 '방법'에서 저주의 능력을 타고난 방법사 백소진을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였다. 긴 머리를 숏컷으로 싹둑 자른 채 염세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에 그가 '기생충'의 다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놀랐다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방영 기간 동안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정지소는 이후 아이돌 세계의 명과 암을 다룬 KBS2 드라마 '이미테이션'에서 3인조 아이돌 그룹 티파티의 센터 이마하 역으로 이전과는 정 반대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연기해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이번 '더 글로리' 속 몸과 영혼을 다쳐 복수만을 꿈꾸게 되는 어린 문동은이 고통을 감내해 내는 처절한 연기까지,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이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파격적인 변신을 보여주는 그는 업계 내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20대 여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또 한 명의 주목 받는 20대 여배우에 신예은 역시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사랑과 우정을 다룬 웹드라마 시리즈 '에이틴'의 도하나로 팬들로부터 '웹드여신'이란 애칭을 받으며 주로 로맨스 작품에서 얼굴을 비춰온 그는 '더 글로리' 출연 전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3인칭 복수'로 먼저 연기 변신을 시도했었다. 쌍둥이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속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 진범을 찾아 헤매는 옥찬미 역을 맡았던 신예은은 스릴러와 액션이 가미된 이 작품을 위해 사격까지 새롭게 배웠다는 뒷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선한 인상과 풋풋하면서도 통통 튀는 매력을 갖춘 덕에 줄곧 선역을 맡아왔던 그의 첫 악역 도전은 성인 박연진 역의 임지연 만큼이나 성공적이었다. 다른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문동은을 괴롭히는 것을 '재미'로 여겨왔다면 박연진은 그것을 '당연히' 해도 되는 여상한 일로 받아들인다. 문동은에게 폭력을 가하며 깔깔거리는 나머지 4인방과 달리 속내를 알듯 모를듯한 미소와 눈빛으로 박연진이란 캐릭터의 잔인함을 표현해 낸 신예은의 변신에 시청자들은 "학창시절에 한 번쯤 봤던 일진의 모습 그대로다"라며 감탄하는 시청평을 남기기도 했다다. 이처럼 쉽지않은 첫 도전의 성공으로, 이전 인터뷰에서 "누구나 악역 연기에 대한 갈증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던 신예은의 갈증은 '더 글로리'를 통해 온전히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각 8부씩 파트 1과 2로 나눠 공개되며, 파트 2는 3월 공개 예정이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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