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에로틱 소설은 다른 분야보다 전자책 구매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패드 안의 사진은 에로틱 소설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일요신문DB |
뉴욕의 여성들, 그 가운데서도 유부녀들 사이에서는 요즘 ‘그 책(The Book)’을 모르면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아이들 등하굣길이나 휴가지 해변에서, 그리고 동네 커피숍에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종종 ‘그 책’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책’이란 바로 영국의 여성작가 E L 제임스(필명)의 에로틱 소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말한다. 지난해 여름 호주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수위 높은 정사 장면과 변태성욕자의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 소설이 뉴욕 중상류층 유부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자책(e북)’만의 독특한 특성 때문인 것으로 출판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클릭 한번으로 책을 구매하거나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여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성공으로 현재 미국과 유럽의 출판업계에는 때 아닌 에로틱 소설 붐이 일고 있으며, 여성 독자들을 타깃으로 한 야한 전자책 소설들이 속속 출간되는 등 그야말로 ‘에로틱 소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불릴 정도로 뉴욕 여성들을 흥분하게 만들고 있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다커의 50가지 그림자> <프리드의 50가지 그림자> 등 총 3부작 가운데 1부다. 이 소설을 쓴 여성은 영국의 전직 방송사 간부이자 두 아들의 엄마인 영국의 에리카 레오나르드(48). 그녀가 처음 에로틱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9년부터였다. 뱀파이어 로맨스 소설인 <트와일라잇>에 매료되어 재미삼아 ‘팬픽션’ 형태로 인터넷에 올린 글이 시초였다. 그녀의 소설이 팬들 사이에서 ‘성인판 <트와일라잇>’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별다른 마케팅이나 홍보 없이 오로지 여성들의 입소문을 통해 유명해진 이 소설은 지난 3월 3일자 <뉴욕타임스> 전자책 소설 분야 1위에 올랐으며, 인터넷 아마존 서점에서도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책의 뜻밖의 성공에 놀란 미국의 유명 출판사 ‘빈티지 북스’가 판권을 따면서 앞으로 이 책은 전자책과 종이책 두 가지 형태로 출간될 예정이다. 또한 <트와일라잇>이 그랬던 것처럼 곧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뉴욕 여성들로 하여금 이 책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상류층의 변태성욕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등장인물부터 여성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려서 잘못된 성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변태성욕자가 된 27세의 젊은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와 순진하고 나약한 21세의 여대생 아나스타샤 스틸이 바로 그들이다. 또한 이들이 소설 속에서 채찍, 수갑, 쇠사슬 등을 이용해서 벌이는 변태적인 정사 장면 역시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가령 “크리스천이 가죽 채찍을 손에 쥔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낡고 찢어진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채찍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찰싹 때리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의기양양했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등의 묘사가 그렇다.
이 책이 인기를 얻으면서 미국 여성들의 생활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료하고 권태로웠던 결혼생활에 활력을 주었고 여성들로 하여금 성적으로 해방되도록 용기를 북돋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에 거주하는 세 아이의 엄마인 한 40대 여성은 “이 소설은 지루한 일상, 즉 징징대는 아이들이나 무료한 결혼생활로부터의 탈출구와 같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여성은 “이 책을 읽은 친구가 말하길 ‘이 책을 읽으면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고 말했다.
또한 육아 및 여성 전문사이트인 ‘디바맘스닷컴’의 운영자인 리스 스턴은 ABC 방송을 통해 “이 책은 아직 무너지진 않았지만 점점 곪아가고 있는 결혼생활을 이어 붙이는 반창고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는가 하면, 앨리슨 브로드 홍보전문가는 “뉴욕의 여성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형태의 카발라다. 토요일 아침 아이들 농구시합장에 모인 엄마들에게 BDSM(결박-지배-사디즘-마조히즘)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 소설이 인기를 얻으면서 뉴욕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 가운데는 ‘회색 넥타이 붐’도 있다. 소설 속의 남주인공이 착용하는 회색 넥타이가 미국 아내들의 쇼핑리스트 상위 목록으로 등장한 것이다. 뉴저지에 거주하는 알리사 골드만이라는 여성은 “남편에게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회색 넥타이를 선물했다”고 말했다. 이런 회색 넥타이의 인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자신의 남편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능수능란하고 지배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회색 넥타이에 투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결혼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 외에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전자책’의 특성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호주의 작은 출판사가 출간한 이래 현재까지 팔린 부수는 10만 부 정도다. 특이한 점은 이 가운데 90%가 전자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1200쪽 짜리 에로틱 소설을 공공장소에서 펼쳐 놓고 보기란 힘든 것이 사실. 또한 아무리 용기가 넘친다 해도 서점에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성인 코너에서 책을 고르거나 서점 계산대 위에 에로틱 책을 당당하게 올려놓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책이라면 이런 어려움이 없다. 그저 방안에 앉아 클릭 한 번으로 책을 다운로드 받거나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도 아무 곳에서나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에로틱 소설 판매의 40%는 전자책 형태로 이뤄지고 있으며, 전자책의 등장으로 인해 지난 5년간 에로틱 소설의 판매량은 꾸준히 증가했다. ‘미출판업협회’와 시장조사기관인 ‘심바 인포메이션’에 따르면 2010년 로맨스 소설의 판매액은 13억 6000만 달러(약 1조 5000억 원)에서 2011년 13억 7000만 달러(약 1조 6000억 원)로 증가했다. 이는 종교(약 8600억 원), 미스터리(약 7700억 원), 공상과학 및 판타지(약 6300억 원), 고전문학(약 5000억 원)에 비해 두 배 내지 세 배가량 더 많은 액수다.
이에 대해 에로틱 소설인 ‘제인(Zane)’ 시리즈를 성공시킨 ‘아트리아 북스’의 주디스 커 사장은 “앞으로 더 많은 서점들이 에로틱 소설을 가판대에 진열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출판사들도 에로틱 소설을 더 많이 출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성공에 자극 받은 출판업계에서는 요즘 때 아닌 에로틱 소설 출간 붐이 일고 있다. 영국 ‘하퍼콜린스’의 에로틱 소설 전문 출판사인 ‘에이븐 북스’는 여성 독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얼마 전 ‘미스치프(Mischief)’라는 전자책 시리즈를 새로 출간했다. 디지털 에로틱 시장을 겨냥한 이 시리즈는 지난 3월 말 13권의 에로틱 전자책 소설을 출간했으며, 앞으로 매달 네 권씩 계속 출간할 예정이다. 애덤 네빌 편집이사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에로틱 출판물을 향한 사람들의 기존 시선이 바뀌도록 도움을 줬다. 이 책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그동안 조롱받던 에로틱 소설 장르가 주류로 편입됐다. 이제 모든 대형 출판사들이 이 장르를 진지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런 책들’이라고 폄하됐던 에로틱 소설이 재조명받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대해 ‘아트리아 북스’의 커는 “에로틱 소설의 유행이 의미하는 것은 판매량 증가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어쩌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다. 바로 미국 여성들의 성을 해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동안 고상한 척하면서 소극적이었던 여성들이 성에 대해 자유롭고 솔직해지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소설 쓰는 ‘미다스 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를 정도로 10년 동안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시리즈는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한 평범한 흑인 여성의 작품이다. ‘제인’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대표작들로는 <애딕티드> <섹스 크로니클> <애프터번> <히트 시커스>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만 모두 24권에 달한다.
‘제인’ 시리즈의 명성은 이미 에로틱 출판업계에서는 자자하다. 그녀의 소설은 일본어, 스웨덴어, 그리스어 등으로도 출간된 바 있으며, 얼마 전에는 케이블 TV 미니시리즈도 제작되는 등 두터운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월든북스’ 서점의 흑인 작가 베스트셀러 15권 가운데 1, 2, 3위를 포함한 7권이 그녀의 소설이며, 지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판매된 부수는 200만 부를 넘었다.
처음 그녀가 에로틱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전직 세일즈우먼이자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는 아이를 재운 후 밤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심심풀이로 에로틱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채팅방에서 사용했던 아이디인 ‘제인’을 필명으로 사용했으며, 이렇게 작성한 소설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했다.
그리고 얼마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소설이 인터넷에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곧 ‘제인’이 누구인가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스터리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곧 마니아층 형성으로 이어졌고, 2000년에는 소설 세 권이 인터넷 소설 형식으로 출간됐다. 이렇게 팔려 나간 인터넷 소설은 무려 25만 부였다.
그리고 2001년 ‘사이먼 앤 슈스터’와 계약을 맺고 정식 출간된 <애딕티드>는 곧 서점가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270만 부가 팔려 나가면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후속작 <애프터번>도 대박을 터뜨렸다. 현재 베테랑 에로틱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제인’은 앞으로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