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원로기사의 감상대로 한일 양국의 천재소녀들이 새해 벽두부터 일합을 가졌다. 승부는 나이가 두 살 많은 김은지의 2-0 승리로 끝났지만 이들의 승부는 지금부터일 것이다.
#슈퍼루키 vs 영재1호의 대결
‘한·일 천재소녀 3번기’. 한국의 김은지 5단(2007년생)과 일본 나카무라 스미레 3단(2009년생)이 바둑TV 새해특집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둘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바둑영재들이다. 나이는 김은지가 두 살 위지만 입단은 스미레가 선배다. 김은지가 13세인 2020년 1월에, 스미레는 2019년 4월에 프로에 입문했다.
‘무서운 10대’ 김은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차세대 대표주자다. 2022년 공식 전적은 94승 45패로 연간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종전 기록은 현 국가대표팀 감독 목진석 9단이 갖고 있던 2007년의 93승(29패)이다. 2022년 김은지는 국내기전, 국제기전을 통틀어 33개 대회에 참가했다. 이 중 여자기전인 효림배와 난설헌배에서 우승하며 슈퍼루키다운 활약을 보여줬다.
스미레는 일본기원에서 신설한 영재특별 채용시스템을 통해 영재1호 입단자가 됐다. 한국 한종진 바둑도장에서 2년간 유학했기에 국내 팬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워낙 어린 나이에 입단한지라 성적을 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지만 2022년 일본 여류명인전, 센코배 등 쟁쟁한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대기임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류명인전 도전기에서 자신을 밀어냈던 일본 여자 일인자 후지사와 리나 5단을 꺾고 여류기성전 도전권을 쟁취, 첫 타이틀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은지, 정신력과 수읽기 돋보여
1월 3일 열린 1국에서는 김은지가 166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였다. 난타전으로 일관된 바둑은 시종 스미레가 앞서나갔고 AI(인공지능) 역시 흑을 든 스미레의 승리 확률을 99%로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승부처에서 스미레는 냉정을 잃고 역전을 허용하고 만다.
이 바둑의 해설을 맡은 박정상 9단은 “인공지능 그래프를 알 수 없는 사람의 형세판단이 결국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스미레 3단이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반격에 굉장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우세를 유지할 수 있는 장면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승부처에서 김은지 5단의 정확한 수읽기가 빛났다”고 평했다.
휴식 없이 곧바로 4일 진행된 2국은 두 기사의 성향을 반영하듯 난타전의 연속이었다. 엎치락뒤치락 팽팽한 형세를 유지하다 마지막 하변 승부처에서 승부가 결정됐다. 후반 하변에서 손해를 본 스미레 3단은 반면 10집 상당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돌을 거뒀다.
전체적으로 김은지의 수읽기와 정신력이 빛났다. 약점이 노출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상대 약점을 찔러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승리한 김은지는 “스미레 3단이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 잘 두는 기사라고 생각했기에 부담 없이 재미있게 둘 수 있었다”면서 “다른 사람과 자꾸 비교하게 되면 내가 뒤처지는 것 같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항상 자신을 라이벌이라 생각하려고 한다”고 승리 소감을 말했다.
석패한 스미레는 “김은지 5단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항상 자극을 받고 의식이 되는 존재다. 이번 대결에서는 1, 2국 모두 초반에 나름대로 잘 풀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중반에 실족했고, 후반에 역전을 당해버렸다. 약점을 알았으니 이에 대한 보강이 필요할 것 같다”면서 “2023년에는 일본에서 타이틀을 따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스미레의 스승 한종진 9단은 “처음 봤을 때 무척 귀여운 첫인상이었는데 바둑 두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물건이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더 정진한다면 바둑계에 한 획을 그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기대대로 성장하고 있어 뿌듯하다”고 지켜본 감상을 전했다.
[승부처 돋보기] 한·일 천재소녀 3번기 제1국
●나카무라 스미레 3단(일본) ○김은지 5단(한국) 166수끝, 백 불계승
[1도] 젖힘이 실착
우하쪽 흑의 실리가 크고 중앙도 두터워서 흑이 크게 우세한 상황. 이 장면, AI는 흑의 반면 13집 우세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흑1의 젖힘이 실착. 이 수로는 A 정도로 지켜두었으면 흑의 낙승 국면이었다.
[2도] 흑, 비명횡사
백의 반격으로 국면이 크게 출렁거리는 장면. 백1로 단수쳤을 때 흑2가 눈을 의심케 하는 수로 이 바둑의 패착이 됐다. 백5까지 졸지에 ▲들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3도] 침착한 수, 흑2
백1에는 흑2가 침착한 수였다. 백3으로 잇고 버텨도 흑4면 중앙 흑의 연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