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매트릭스’ ‘격암유록’ 맞닿는 지점엔 “토끼를 따라가라” 메시지가…
토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대표 아동 소설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린 소녀인 앨리스가 토끼굴을 타고 떨어져서 도착한 이상한 나라에서 겪는 모험을 그린다. 여기서 이상한 나라로 이동하는 통로가 ‘토끼굴’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토끼는 정장 차림에 회중시계를 들고 “바쁘다 바뻐”를 외치며 토끼굴로 들어가고, 앨리스는 그런 토끼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다. 정장을 한 토끼가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기이한 광경이다. 하지만 어린 앨리스는 이를 보고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 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는 토끼가 위협적이지 않고, 긍정적인 존재로 각인됐다는 뜻이다. 결국 토끼는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끄는 안내자인 셈이다.
토끼를 활용한 이런 사상은 한국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 명종 때 남사고(1509∼1571)가 남긴 예언서 ‘격암유록’에는 ‘수종백토주청림’(須從白兎走靑林)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얀 토끼를 따라서 푸른 숲으로 따라가라’는 의미다. 여기서 푸른 숲은 통상 낙원이나 새로운 세상을 가리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의 쓰임과 맞닿아 있다.
이런 토끼의 이미지는 밀레니엄을 맞기 전 세기말 감성을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펼친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도 활용된다. 주인공 네오(키애누 리브스 분)는 컴퓨터 화면에서 ‘하얀 토끼를 따라가라’(Follow the white rabbit)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그 후 그는 한 파티에서 어깨에 토끼 문신을 가진 한 여성을 본 후 뒤를 좇는다. 그곳에서 네오는 인류를 지배하려는 인공지능과 기계군단에 맞서 싸우는 모피어스와 만나게 된다.
네오는 모피어스의 가르침을 통해 진실에 눈뜨게 된다. 인류를 인간성이 말살된 채 통제에 따르는 집단으로 만들려는 집단에 맞서 길고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물론 토끼가 이끈 곳이 무릉도원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세계’임은 분명하다. 토끼가 그를 불편한 진실로 안내했다는 뜻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액션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3’(2006)에서도 토끼는 주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시리즈에서 주인공 이던 헌트(톰 크루즈 분)는 특수 요원 임무를 반납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꿈꾼다. 하지만 악명 높은 국제 암거래상인 오웬 데비언은 이던 헌트의 연인까지 납치하며 압박한다. 정보 분석팀은 이던 헌트에게 오웬이 토끼발이라는 정체 모를 물건을 노리고 있다고 알려 준다. 그리고 오웬은 끊임없이 이던 헌트를 압박하며 “토끼발은 어디 있나?(Where is the rabbit foot?)”라고 묻는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3’는 끝내 토끼발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의 흐름 상, 생화학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존재 정도로만 유추된다. 이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주제와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를 계속 주입해 관객들에게 혼란을 불러 일으켜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영화 제작 기법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된 뒤 관객들 사이에서도 토끼발의 의미와 상징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영화가 이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 ‘토끼’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토끼를 은유의 대상으로 삼은 또 다른 작품은 ‘겟 아웃’과 ‘놉’으로 유명한 조던 필 감독의 영화 ‘어스’(2019)다.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철창에 갇혀 있는 토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사한 외모를 가진 토끼들이 잔뜩 갇혀 있는 철창은, 주인공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들이 어디선가 살고 있으며 그들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조던 필 감독은 ‘겟 아웃’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을 토끼에 비유한 바 있다. 누군가를 궁지로 몰아갈 때 ‘토끼몰이’라는 표현을 쓰듯, 조던 필 감독이 만드는 세상 속에서 토끼는 유약하고 위태로운 존재인 셈이다.
이외에도 토끼를 내세운 작품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는 실사와 애니메이션 토끼를 한 장면에 등장시키는 획기적인 시도로 눈길을 모았다.
물론 대중이 일반적으로 토끼를 보면 떠올리는 선하고 순한 존재로 그린 작품도 있다. 2016년 개봉해 470만 관객을 동원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열혈 경찰 주디 홉스인데, 그는 토끼다. 귀여운 외모만큼 상냥하고 낙천적이고 따뜻하다. 경찰학교를 수석 졸업했지만 현업에 나가자 무시당하기 일쑤다.
‘주토피아’ 세계관 속 경찰은 대부분 코뿔소, 물소 같은 대형 포유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작고 힘이 약해보이는 주디를 무시하고 교통 통제와 같이 덜 위험한 일을 맡긴다. 하지만 주디는 사명감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주어진 일을 야무지게 해내는 캐릭터다. 그가 약자의 편에 서서 사건을 해결한 후 인정받는 결말은 훈훈함을 준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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