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한국으로 압송된 후 기자회견을 하는 김현희. 연합뉴스 |
나는 부모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킨 뒤에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오늘은 마유미를 호송하러 특별전세기를 타고 바레인으로 날아가는 날이었다. 마유미의 정확한 정체와 KAL기 추락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유미를 한국으로 압송해 취조를 하고 KAL기 추락의 실체를 밝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는 바레인에 먼저 나가서 활동을 하고 있는 한영수 과장의 보고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에서 폭파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겨울이지만 날씨는 좋았다. 거리의 가로수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하늘은 잿빛으로 우중충했다. 아직 본격적인 추위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선거는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가열되고 있었다. 17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직선제 선거였다. 본격적인 선거유세가 시작되어 신문의 일면이 항상 선거 소식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선거보다 마유미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호송 팀에 소속되자 나는 마유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런 여자가 북한의 공작원이 되어 민간 여객기를 폭파할 수 있을까. 마유미가 일본인이라는 것은 위장이 확실했다. 이미 그녀의 여권이 위조여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미모의 테러리스트라니….”
나는 무기를 다루는 법은 배웠지만 폭탄까지 설치할 자신은 없었다. 물론 명령이 내려온다면 어쩔 수 없이 실행을 해야 할 것이다.
‘KAL기 폭파가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한 것일까?’
나는 어둠 속에서 마유미의 하얀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대통령선거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은 모두 사무실에 두고 개인적으로 소지하지 않는다. 여권은 요원들이 관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
수사국장이 호송 팀을 모아놓고 지시했다.
“외부에도 연락하지 말고 기자들에게 노출되어도 안 된다.”
수사국장의 잇단 지시에 나는 상황이 상당히 긴박하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호송 팀은 안기부 버스로 김포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호송 팀에 여자라고는 나와 후배 여수사관 채명희(가명)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중대한 사건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채명희는 일본어를 전공하여 마유미와 대화할 때 필요하다고 상부에서 판단하여 합류한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는 귀빈실로 가게 됐다. 귀빈실은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다. 행정부처에서는 장관 이상, 입법부는 국회의원들, 사법부는 검찰총장이나 대법원 판사 이상, 그리고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버스에서 내리자 곧바로 귀빈실로 가게 되어 나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외국을 여행한 일이 없었다. 외국 여행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비행기를 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출국 수속이나 여권을 만드는 일도 번거로웠는데 안기부에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귀빈실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조용히 대기해.”
호송 팀장인 김영호 과장(가명)이 우리에게 지시했다. 우리는 기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눈치 챌까봐 더욱 긴장했다. 우리는 출국 수속조차 하지 않고 귀빈실에서 대기했다. 출국수속은 공항에 파견되어 있는 안기부 직원이 대신했다. 나는 바레인으로 출국할 때나 돌아올 때 내 여권을 보지 못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당시에는 안기부가 권력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비행기 타러 가자고.”
귀빈실에서 한 시간쯤 기다리자 호송 책임자인 김영호 과장이 지시했다. 우리는 김 과장을 따라 활주로로 나갔다. 활주로에는 특별전세기인 맥도넬더글러스 DC-10이라는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미국 연방항공국 규정에 따라 개발되었는데 에어버스의 A300, 록히드마틴의 L-1011, 보잉의 747과 경쟁을 하던 비행기였다. 그러나 설계 당시부터 화물칸 도어 등 여러 곳에서 기체 결함이 발견되었는데 무시하고 생산하는 바람에 사고가 빈발해 1989년 단종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론 당시 안기부의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탑승하자 안기부 수사국 호송 팀뿐만 아니라 의무실의 의사와 간호사들, 다른 부서에서 온 직원들도 여럿이 있었다.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에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도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들 누구나 그런 불안감을 갖지만 나 역시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몸을 떨었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추락하면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KAL기가 추락했으니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선배님,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탑승을 마치자 채명희가 나에게 속삭였다.
“대공부서겠지.”
“저기 있는 사람들은 군인 같아요. 체격이 건장하고 눈빛이 날카로워요.”
채명희가 계속 나에게 속삭였다. 나도 그들을 살펴보았는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탔기 때문에 귓전이 먹먹했다. 기압 차이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리자 무사히 이륙을 마쳤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창을 내다보았다. 비행기의 창으로 김포공항 일대의 넓은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들판은 추수가 끝나 황량했다. 비행기에는 여자 승무원들은 보이지 않고 남자 승무원들만 있었다.
“두 분은 통역입니까?”
비행기가 이륙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자 짧은 머리의 사내들이 나와 채명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채명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가능하면 외부인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저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한참이 지나 김영호 과장에게 물었다.
“경호담당 특수부대 요원들이야.”
김영호 과장이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마유미를 경호하기 위해 배치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을 보자 더욱 긴장이 되었다. 비행기는 어느덧 구름 위로 날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가 구름 위로 날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음료수 드시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남자 승무원들은 나와 후배 여수사관인 채명희에게 기내 음료수와 스낵을 이것저것 가져다주면서 말도 붙이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여자 승무원은 없나요?”
나는 여행이 지루하여 통로를 지나가는 남자 승무원에게 물었다.
“상부 지시로 남자 승무원들만 탔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마유미 같은 테러리스트를 호송하는데 여자 승무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바레인까지는 직행으로 가는 데도 10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기내 식사를 하고 억지로 잠을 청하는 등 시간을 보내느라고 애를 써야 했다. 나는 그때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주기도문도 외웠다. 다른 요원들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긴장을 하고 있는 빛이 역력했다.
비행기는 어느덧 태국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덜컹하고 내려앉으면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이래?”
누군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나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으나 나는 의자를 꽉 쥐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고 불안감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안기부에 입사하여 훈련을 받을 때 공수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공동묘지까지 갔다가 오지 않았는가. 다행히 2, 3분이 지나자 비행기가 난기류를 빠져 나와 안정을 찾았다.
바레인이 가까워졌다. 짧은 머리의 사내들이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총기를 점검하고 테러 진압 때 사용하는 눈과 입만 뚫린 검은 모자를 썼다. 나는 그들이 무장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새삼스럽게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여러 해가 지나 김현희가 사면되고 안보강연을 나간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 돌아가려고 할 때 한 남자가 김현희를 경호하던 나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나 기억하시겠습니까? 김현희 씨를 호송하러 바레인에 갈 때 특수부대 요원으로 함께 갔었지요. 지금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비행기 여행은 지루했다. 더욱이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10시간 내내 나는 긴장해 있어야 했다. 나뿐이 아니라 우리 요원들 모두 긴장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 마침내 바레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트랩에서 내리자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끼쳐왔다. 서울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두꺼운 모직 투피스를 입고 왔는데 사막의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해? 너무 덥네.”
채명희가 중동지방의 열기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여름옷 준비 안했어?”
나는 이국적인 풍경에 잠시 넋을 잃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네. 그런 지시는 없었잖아요?”
“나도 준비하지 않았어. 조금 참으면 되지 뭐.”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공항이 아니라 군 비행장이었다.
“오늘 호송은 못할 것 같아. 바레인에서 내일 출발하래.”
한영수 과장이 비행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하면서 말했다. 비행장 밖으로 나오자 뜨거운 열기가 더욱 사납게 휘몰아쳐 왔다. 비행장 주변에는 TV에서 보았던 중동지역 대테러진압 복장을 하고 총을 들고 순찰을 하는 바레인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하러 왔구나’ 하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