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주간 <슈테른>이 소개한 할리우드의 전쟁 영화 촬영 장면.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실제 군인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한다고. |
할리우드와 펜타곤(미국방부)이 상부상조하는 돈독한 사이라는 것을 아는지. 연예산업과 군산업이라, 어째 잘 안 어울리지만 둘 사이에는 묘한 연대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특히 전쟁영화나 군부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그러하며, 미군이 등장하는 <디어존>과 같은 로맨스 영화에도 간혹 펜타곤의 입김이 작용하곤 한다.
할리우드와 펜타곤의 묘한 파트너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펜타곤은 할리우드에 “최선을 다해 도와줄테니 우리 미군을 멋있게 묘사해달라”고 말하고, 할리우드는 펜타곤에 “미군을 멋있게 그려줄테니 우리가 돈을 벌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다시 말해서 펜타곤은 할리우드 제작사에 탱크, 전투기, 병사, 전문지식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이를 지원받은 할리우드 제작사는 근사한 영화를 만들어 미군의 대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쪽은 비용 절감, 그리고 다른 한쪽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인 셈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이런 파트너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군부대용 홍보영화로 전락했다거나, 펜타곤이 지나치게 할리우드 영화를 검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 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근래 들어 할리우드와 펜타곤이 손을 맞잡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고 전하면서 그 배경에 대해 보도했다.
할리우드의 한 액션영화 촬영장. 전투기, 탱크 등을 배경으로 엑스트라 배우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감독의 큐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을 확인한 감독이 “오케이! 간다!”라고 외치는 순간, 누군가 옆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됩니다.”
모든 배우들이 동작을 멈췄고, 흠칫 놀란 감독은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시종일관 감독 옆에 서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이 남성은 조연배우 한 명을 가리키면서 “이 상태로는 촬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배우들이 입은 군복은 사전에 미군으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걸까.
의아해하는 감독에게 이 남성은 “수염이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해당 조연배우의 턱에 짧게 자란 ‘염소수염’ 때문에 촬영을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감독은 한숨을 쉬면서 “젊은 병사가 전투상황에서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면도를 못했다고 칩시다”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그 남성은 “미 육군하사는 절대로 염소수염을 기르지 않습니다. 수염을 자르지 않으면 당장 탱크를 철수시키겠습니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남성의 이름은 그렉 비숍(44). 현재 미국방부 산하 특별부대인 ‘엔터테인먼트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육군중령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이 ‘엔터테인먼트 부대’는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해안경비대를 모두 대변하고 있으며, 주된 임무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에게 전투 장비를 대여해주거나 전쟁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도록 자문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할리우드를 돕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다른 데 있다. 즉, 대중문화를 통해 미군의 이미지를 홍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례로 1986년 작인 영화 <탑건>의 경우가 그랬다. 할리우드와 펜타곤 양측 모두가 성공을 거둔 이 작품은 곳곳에서 미 공군의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그야말로 ‘공군의, 공군을 위한, 공군에 의한 영화’였다. 전 세계적으로 3억 5000만 달러(약 4000억 원)의 흥행 수익을 거두었으며, 한동안 톰 크루즈에 매료된 미국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공군 지원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와 관련, ‘엔터테인먼트 부대’ 최고사령관인 필립 스트럽은 “할리우드는 우리에게서 군사장비, 전문지식, 병사들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할리우드에게서 관객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지원병 모집 외에도 펜타곤이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이미지를 홍보하는 까닭은 또 있다. 이른바 ‘실패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이라크 전쟁 때문에 돌아선 민심을 하루빨리 되돌리기 위해서다. 지난 10년 동안 벌어진 이라크전으로 미군에 대한 신뢰는 현재 어느 때보다 실추된 상태. 따라서 펜타곤은 치밀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대중문화, 즉 영화관이나 TV 브라운관, 컴퓨터게임 등을 통해 미군의 이미지를 다시 근사하게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펜타곤이 할리우드에 지원하는 것은 전투기, 탱크, 헬기 등 군장비만이 아니다. 때로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병력도 지원해준다. 여러 방면에서 펜타곤의 도움을 받은 <트랜스포머 3>의 경우에는 소위 화면발을 잘 받는 전차 부대의 한 보병이 대사가 있는 역할까지 맡기도 했다. 이유는 실제 배우들 중에 그처럼 실감나게 고함을 지르면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는 4월 말 개봉하는 <어벤져스>에서는 스물다섯 명의 미군부대 소속 헌병들이 자동권총과 MK-19 유탄발사기를 들고 아이언맨이나 헐크 등 슈퍼히어로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스칼렛 요한슨 등) 사이를 행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밖에도 훈련소를 촬영장으로 임대해주는 등 장소 제공도 간간히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장비와 병력, 장소는 모두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얼마 전부터 일부 특수한 경우에는 대여료를 받는 것으로 방침이 바뀌었다. 가령 전투기 조종사들의 일상적인 작전 수행이나 해병대의 훈련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할 경우에는 무상이지만, ‘전투기로 나선형으로 하강 비행을 해달라’는 식의 특별한 요구를 할 경우에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터미네이터 4>에 등장했던 아파치 헬리콥터를 사용할 경우에는 시간당 5000달러(약 564만 원)를, 그리고 F-22 전투기의 경우에는 시간당 2만 2000달러(약 2500만 원)를 지불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할리우드와 펜타곤이 손을 잡은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랜래피즈 연구소’는 “9·11 테러 이후 영화 제작사들이 펜타곤과 단순히 협력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영화제작을 위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난한다.
가령 할리우드 담당 대원들은 일반적으로 처음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제작에 관여하며, 이들이 이렇게 검토하는 시나리오는 매년 수십 편에 달한다. 검토 후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군대 계급의 잘못된 표현이나 무기명이나 작전 내용을 수정하는 식이다.
문제는 영화 스토리나 주연 배우를 묘사하는 데 있어 의견 마찰을 빚는 경우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에서 미군 장교가 전쟁 선동가로 묘사되자 결국 펜타곤 측이 전투기 대여를 금지했던 것이 한 예다. 이와 관련 스트럽은 “군부대의 주요 인물이 비현실적으로 묘사될 경우에는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 <크림슨 타이드> 같은 경우 핵잠수함의 갑판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미 해군 역사상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런 설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베트남전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명작 <플래툰> 역시 펜타곤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병사들이 마약을 피우는 장면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포레스트 검프>의 경우에는 아이큐 75인 주인공이 우연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영웅으로 금의환향한다는 설정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름지기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저능아를 고용한다는 설정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엔터테인먼트 부대’를 ‘검열기관’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미 펜타곤은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할리우드에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지난 60년간 이런 동맹 관계는 계속 유지되어 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할리우드와 펜타곤의 은밀한 관계 때문에 미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뉴욕 공화당 의원인 피터 킹이다. 그는 “펜타곤이 캐슬린 비글로우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인 마크 볼에게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작전과 관련된 일급기밀문서를 비밀리에 열람하도록 했다”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이라크 폭발물제거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비글로우 감독은 현재 인도에서 미 특수정예부대인 네이비씰의 빈 라덴 체포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오는 11월 대선 직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공화당 측은 “오바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해질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킹 의원이 겉으로는 미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지난해 가장 성공적이었던 군사작전이 영화화될 경우 오바마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해지진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 미국의 테러 진압 해군 특공대 네이비씰. |
빈 라덴 체포로 인기가 ‘하늘’
비글로우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다름 아닌 ‘네이비씰’이다. 빈 라덴 체포작전의 성공을 통해 일약 전 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른 네이비씰의 높은 인기가 반영된 결과다. 펜타곤 입장에서는 이라크전으로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어서, 그리고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이야깃거리가 생겨서 좋은 셈이다.
지난 2월 개봉된 <액트 오브 밸러:최정예부대>도 네이비씰의 덕을 톡톡히 본 경우다. 납치된 CIA요원을 구출하는 네이비씰의 활약을 다룬 이 영화는 3월 말까지 5000만 달러(약 565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실제 네이비씰이 출연한다는 점에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첨단장비 역시 네이비씰이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며, 이런 까닭에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실감나는 영상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생생한 묘사가 압권으로 꼽힌다. 또한 최초로 펜타곤이 제작을 의뢰한 영화이기도 하며, 영화를 본 펜타곤 측은 “매우 훌륭하다”며 흡족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군부대 홍보영화’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미군을 영웅화시키는 묘사들이 억지스럽다”라거나 “뻔한 소재에 뻔한 스토리여서 더 식상하다”라는 등의 의견이 그렇다.
그럼에도 당분간 할리우드에는 이처럼 네이비씰을 소재로 한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질 예정이다. 2013년 개봉될 피터 버그 감독의 <론 서바이버>도 그 가운데 하나며, 제리 브룩하이머 역시 곧 네이비씰의 사생활을 다룬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할 예정이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