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2011~12시즌 돌풍을 일으킨 KGC에는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프로 원년 이후 최고 성적인 정규리그 2위, 역대 정규리그 팀 최다승(36승18패),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뤄낸 이상범 감독을 둘러싼 얘기였다. 4강 플레이오프에선 ‘챔프전 진출에 실패하면 잘린다’란 말이 나돌았고, 챔프전 진출 이후엔 ‘우승 못하면 감독 경질’이란 황당하지만 근거 있는 뜬소문이 이 감독을 괴롭혔다.
이 감독은 KGC 프랜차이즈 스타다. 1992년 SBS에 입단해 2000년 현역서 은퇴했다. 미국에서 1년 연수를 받은 뒤 2000~01시즌에 SBS 코치로 합류했다. 2008~09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2009~10시즌 정식 감독이 됐다. 오래 붙어 있었다. 꼬박 20년이다. 제대로 된 성적을 낸 적도 없다. 사령탑에 앉은 지난 세 시즌 성적은 7~9위가 고작이다. 오직 ‘리빌딩’을 외치며 버텼다.
성적이 바닥을 치는데 ‘리빌딩’을 기다려주는 넉넉한 구단은 없다. 지난 시즌까지 KGC의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김호겸 씨(현 한국인삼공사 홍보부장)의 믿음과 희생이 이 감독의 뒤를 든든히 받쳤다. 체육관 옆 포장마차에서 소주로 밤을 달래는 일이 다반사였다. 두 다리 펴고 잠을 청한 적도 없다. 양복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닐 정도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시한부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지난 몇 년간 내 가슴 한 쪽은 항상 울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리빌딩을 했던 지난 2~3년이 가장 힘든 시기”라고도 말한다.
이 감독의 리빌딩 인생역전은 시간과 행운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이 감독은 2009년 주희정(SK)을 과감히 내보내고 군 입대 예정으로 뛰지도 못할 김태술을 영입했다. 양희종도 군대에 보냈다. 꼴찌는 뻔한 시나리오였다. 기다렸다. 2010년 1, 2순위로 박찬희와 이정현을 보강했다. 그리고 ‘오세근 드래프트’라고 불렸던 2011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 행운을 얻었다. 이 감독은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고, “리빌딩의 끝!”이라고 외쳤다. 김태술과 양희종이 제대 이후 복귀하면서 3년 만에 이룬 막강 스타군단의 탄생이었다.
우승이 결정되던 순간, 이 감독의 눈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이 감독은 우승을 실감할 여유도 없었다. 선수 때부터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2류 농구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머리털 나고 처음 하는 우승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옛날 생각만 났다. 정말 말도 많았고, 못 들을 얘기도 많이 들었다”라며 울먹였다.
▲ 챔피언전 우승 후 이상범 감독이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KBL |
이 감독이 입버릇처럼 늘 하는 말이 있다. “선수들이 알아서 잘했다. 감독이 한 건 없다. 기본 마인드가 중요하다. 우린 젊기 때문에 패기와 열정으로 뛸 뿐이다.” 이 감독은 선수 우선이다. 기자들을 상대로 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피한다. 코트에서 웃는 얼굴처럼 언제나 ‘허허실실’이다.
이것은 ‘이상범의 개똥철학’ 때문이다. 이 감독은 “감독은 조연, 선수가 주연”이라고 늘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지도철학이다. 우승을 이룬 뒤에도 “난 리더십이 없다”고 얘기한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자신을 낮추는 것도 지나치면 불편하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개똥철학’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이 감독은 코치만 9년을 했다. 4명의 감독을 모시면서 자신만의 지도철학을 굳혔다. 바로 ‘열린 귀’다.
#동부를 잡은 비법
원주 동부와의 챔프전은 부담스러웠다. 동부는 역대 정규리그 최다승(44승) 우승을 차지했고, SBS가 갖고 있던 최다 15연승을 갈아치우고 16연승 대기록을 세운 역대 최강팀이었다. 리빌딩 완성으로 첫 발을 내딛은 KGC가 상대하기엔 구력과 경험에서 밀렸다.
이 감독은 입과 귀를 열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구했다. 나이가 어려도 동료 감독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참 쉬웠다. 주위 사람들을 귀찮게 괴롭혔다. 한국농구의 최고 지도자로 평가받는 방열 건동대 총장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었고, 모비스 유재학 감독(모비스)과 KT 전창진 감독에게도 전화를 걸어 혜안을 구했다. 전술을 얻었고, 전략을 짜는 법을 배웠다. 이 감독은 단순히 들은 대로 꼭두각시처럼 굴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시리즈 내내 자기만의 것으로 연구하고 승화시켰다.
그로 인해 이 감독은 동부의 약점을 지독하게 파고들었고, KGC의 강점만 부각시켰다. 동부 강동희 감독이 “챔프전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의 KGC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깜짝 놀랄 만한 반전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쓰지 않던 변형된 지역방어인 드롭 존을 과감히 활용했고, 경기 내내 풀 코트 프레스로 상대를 압박했다. 막강하던 ‘동부산성’도 KGC의 힘과 투지, 순간의 허를 찌르는 전술, 전략에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상상할 수 없었던 시리즈 4승2패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KGC의 우승 반전 드라마였다.
▲ 누구도 예상 못한 우승이었다. 6일 막강 ‘동부산성’을 무너뜨린 KGC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KBL |
▲ 이상범 감독도 달뜬 표정이다. 사진제공=KBL |
이 감독은 어느새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즌이 끝나면 5일 안에 해외로 외국선수를 보러 나갔던 습관 그대로다. “저 밑에 있을 때 우승은 남의 나라 얘긴 것 같았다.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힘들게 만들어온 것만 기억한다. 이젠 KGC를 명문구단으로 만들고 싶다. 다음 시즌도 멋지게 만들어 보겠다.”
‘초짜’ 딱지를 뗀 이상범 감독의 진짜 지도자 인생은 이제부터다.
서민교 mk스포츠 기자
개성에 희생을 더했다
올 시즌 프로농구는 역대 최다인 130만 관중을 돌파했다. 흥행몰이를 이끈 팀이 바로 KGC다. KGC에는 젊고 외모도 뛰어난 개성 강한 선수들이 뭉쳤다. 팀에서 개성은 자칫 잘못하면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KGC는 개성을 희생으로 포장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팀을 만들어갔다.
김태술은 이적과 공익근무로 거의 3년을 코트와 떨어져 있었다. 가드 ‘6년 주기설’의 마지막 주자인 김태술의 능력은 올 시즌 재평가받았다. ‘나만의 농구 색깔’로 흐트러질 수 있는 KGC를 하나로 묶었다.
괴물 신인 오세근은 그의 가치를 코트에서 입증했다. 개인 기록에 대한 욕심보다 팀의 궂은일을 도맡았고, 발목이 퉁퉁 부어도 포기를 몰랐다. 결국 챔프전에서 김주성을 넘어 왕좌를 물려받았다. 플레이오프 MVP는 그에게 어색하지 않은 왕관이다.
우승을 결정지은 끝내기 한 방을 터뜨린 양희종은 플레이오프에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프로다운 프로선수로 인기몰이를 책임졌고, 이정현과 박찬희는 결정적일 때 한 방을 보여줬다.
맏형 김성철은 젊은 후배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코트 안팎에서 정신적 지주가 됐다. 현재보다 미래가 밝은 이상범 감독은 행복하다.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