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는 20세기 마지막 거장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화가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삶으로 그림으로 증명하는 화가가 앙드레 브라질리에다. 프랑스 미술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본 것은 바로 관조하는 자에게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올해 나이 94세, 노작가의 평온한 얼굴은 지나간 인생을 잘 소화한 자의 얼굴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를 지나간 경험이 그를 이루는 것이지만 그 경험이 감옥이 된 경우도 만만치 않은데 그를 지나간 경험은 그의 정원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풀어주며 자유롭게 노닐게 하는 아름다운 정원 말이다.
전시회의 주제가 내 시선은 끈다. “멈추어라, 순간이여!” 그 주제 아래서 그를 그답게 만들었던 시간들, 사람들, 사건들, 풍경들이 다 모였다. 그중 한 여인, 그의 영원한 뮤즈 샹탈(Chantal)이 있다. 샹탈이 등장하는 그림은 즉각적으로 시선을 끈다.
사색적이거나 본능적이거나 그 속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환희는 감춰지지 않으므로. 나체여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히 존재하는 여인, 브라질리에는 평생 그 여인만을 사랑했다고 전하는데 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한 순정은 어쩌면 그 남자의 평정심일 수 있겠다. 그 여인이 주인공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파우스트의 마지막 문장이 생각난다.
‘여성적인 것이 인간을 구원하다.’
그 여인 샹탈의 인터뷰가 마음에 닿았다.
“그의 그림에서 나는 나를 닮은 여인을 보지만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샹탈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림 속의 샹탈은 브라질리에의 아니마이고, 그것을 인지하고 남편을 존중해온 샹탈은 그래서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단단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나이 들수록 편안해졌다. 내가 제일 오랫동안 봤던 그림은 마침내 고향집으로 돌아와 그린 눈 오는 날의 풍경이었다. 50년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와 어린 날의 햇빛을 느끼며 평온을 찾는 예술가는 마음속에 온기가 있는 사람이고, 그 온기로 궁극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파우스트 문장이다. 100세가 되어 모든 것을 다 갖춘 파우스트는 완벽해보였다. 그런데 틈이 있었다. 열쇠구멍만 한 틈, 그 틈으로 근심이 스며들며 말을 건다. 너희 인간들은 어찌 그리 맹목이냐고. 그렇게 근심과 불안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눈을 잃은 파우스트는 대신 심안을 얻고 생의 찬가를 부른다.
“자유도, 생명도 오로지 날마다 그것을 정복한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 나, 자유로운 터전에서 자유로운 백성들과 서고 싶어라. 그 순간 나, 말해도 좋으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메피스토를 환호하게 한 그 문장이 그가 그린 숲과 나무와 말과 여인 속에서 음악이 되어 번진다. 그에게 푸른색은 마음의 색이고 꿈의 색이다. 거기에 핑크와 흰빛을 더해 그는 거칠 것 없는 생명의 환희를, 환희의 춤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나는 생각했다. 나의 색은 무슨 색일까. 붉은빛인 적도 있고, 푸른빛이었던 적도 있는데, 지금 나의 색은 그레이 같다. 나에게 그레이는 모든 것을 묻고 세상사 모른 척 관심을 끊고 고요해지려고 하는 색이다.
지금 당신이 당신의 세상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일까. 무슨 색이 당신의 색인가. 당신과 세상 사이의 온기 혹은 냉기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재미있다. 그렇게 희미한 나의 색을 찾다보면 그 색 위로 내 꿈의 색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때 나타나는 색은 무슨 색이든 생명의 색이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