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일요신문>과 만난 김현희. KAL기 폭파범이라는 꼬리표가 어울리지 않게 곱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우태윤 기자 |
나는 한영수 과장에게 말했다.
“괜찮겠어? 자해를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잘 살펴보고 있을게요.”나는 한영수 과장의 허락을 받아 마유미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수갑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더욱 세밀하게 감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행기에는 바레인 공항에서 자살한 신이치의 시체도 관에 냉동 보관되어 실려 있었다. 마유미와 신이치의 소지품들도 증거물로 인도 받았다.
‘시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나는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솔직히 당시에 나는 노련한 수사관이 아니었다. 시체를 실은 관 뚜껑이 열리고 신이치가 살아 나와서 비행기를 폭파시키는 유치한 상상도 하고, 북한에서 테러리스트를 사주하여 비행기를 저격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마유미의 운명도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이제는 죽을지 살지 모르는 서울로 압송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저런 처지가 되었다면 어떤 심정일까. 똑같은 공작원들인데 신이치는 죽고 마유미는 살았다. 삶과 죽음이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는 하지만 마유미의 초췌한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졌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뜻밖에 기내에 먹을 것이 없었다. 바레인에 도착하자마자 마유미의 신병을 바로 인도해 올 줄 알고 KAL기 측에서 식사를 하루 분만 준비하였는데 하루를 더 바레인에서 체류하게 되다보니 음식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호송 팀은 컵라면과 스낵, 음료수 등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서울로 오는 동안 라면을 한 번밖에 먹지 못했다. 나와 채명희는 바레인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내내 마유미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식사를 하셔야 하니까 이쪽으로 잠깐 오세요.”
남자 승무원이 나를 승무원실로 불렀다. 다른 수사관에게 자리를 부탁하고 남자 승무원을 따라 가자 컵라면과 기내에 있던 음료용 올리브절임을 몇 개 곁들여서 식사를 하게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특별한 배려를 해준 남자 승무원에게 인사를 하고 컵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마유미에게도 무얼 먹여야 하지 않아?”
나는 마유미에게 컵라면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탈수를 우려해 잠시 마우스피스를 떼어 내고 컵에 빨대를 꽂아 마유미에게 음료수를 마실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거부했다.
‘역시 공작원이라 다르구나.’
일반인들이라면 음식은 먹지 않아도 음료수는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유미가 탈진하여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의료진도 그 점을 걱정했다. 의료진과 한영수 과장이 상의하여 포도당을 주사하기로 결정했다. 마유미를 간이 침대에 눕히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몸을 뒤틀면서 강하게 저항했다.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요. 포도당을 투여하는 거야.”
나와 수사관들이 번갈아 설득했으나 그녀는 계속 저항했다. 결국 수사관들이 팔다리를 잡고 의료진이 억지로 마유미의 팔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잠시 후 마유미가 포기했는지 저항을 멈췄다. 나는 마유미의 얼굴을 살폈다. 마유미가 눈을 감고 있어서 자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레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느라 몸이 지쳐 있었어요. 게다가 서울로 가는 것도 불안했고….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있다가 누워서 주사를 맞는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웬일인지 잠이 들고 말았어요.”
훗날 김현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피곤할 때 발에 이불을 덮으면 잠이 잘 온 경험을 기억하고 누워있는 그녀의 발에 기내용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녀를 동정해서라기보다 무사히 서울까지 호송하기 위해서였다.
“소변을 보게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 겁니까?”
의료진이 우리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녀의 소변 문제로 회의를 했다. 비행기 화장실을 살폈으나 비좁아서 수사관들과 함께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 혼자 들어가게 되면 혹시라도 자해를 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수 없으면 비뇨기과적 방법으로 소변을 빼내는 방법이 있어요.”
여자 의사가 말했다. 우리는 여자 의사의 말에 동의하고 비뇨기과적 방법으로 소변을 빼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단어 하나가 흘러나왔다.
“어, 엄마아….”
나는 마유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채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너도 들었지? 엄마라고 한 말….”
나는 채명희에게 물었다.
“분명 엄마라고 한 것 같았어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귀에도 그렇게 들렸어요. 하지만 엄마라고 그런 것도 같고…. 마마라고 그런 것도 같고…. 외국도 엄마 발음은 다 비슷하잖아요?”
채명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네.”
나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비행기는 점차 서울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면서 누군가가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내릴 준비를 하라고 하자 기내가 분주해졌다. 서울이 가까워진다는 말에 마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내릴 것인지 의논하다가 나와 남자 수사관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내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갑자기 계단에서 구른다든가 외부의 공격 등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근접 경호를 하기로 했다.
▲ 김현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입었던 체크무늬 코트는 원래 채명희의 옷이었다. 당시 김현희 호송 임무를 맡았던 수사관 최창아 씨(오른쪽)는 얼굴이 노출되고 말았다. 보도사진연감 |
“모두들 수고했어.”
수사국장이 우리 호송 팀을 격려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안도했다. 마유미는 여전히 가늘게 떨면서 울고 있었다.
“좋은 데 왔는데 울긴 왜 울어?”
수사국장이 마유미에게 말하고 바깥에 많은 기자들이 와 있으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처음에 비행기에서 내리면 곧바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차량으로 옮겨 타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아니 입사 초기부터 신분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라고 하고서는 이제 와서 기자들 앞에 내 얼굴을 드러내란 말이야? 앞으로 나는 수사관 생활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그의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마유미는 나와 남자수사관이 양팔을 잡고 있는데도 몸에 힘을 주고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바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몸으로 시인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에 오기를 그렇게 거부할 수 있을까. 나와 남자수사관은 그녀를 잡아끌듯이 비행기 문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비행기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계단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수많은 기자들이 촬영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서울의 오후는 햇살이 화창했으나 뺨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추운 줄도 모를 정도였다. 수사관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없는 나로서도 당황스럽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마유미는 아직도 다리에 힘을 주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도무지 걸으려는 의지가 없는 모습이었다. 저러다가 분명 죽으려고 별 짓을 다할 것 같았다. 만약 계단을 내려가다가 일부러 뒹굴든가 다리를 헛디뎌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이니까 발 조심해.”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듣든지 말든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