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맹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측근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이맹희 회장은 사과를 먹다가도 옆에 누가 있으면 맛있다고 하면서 그걸 그대로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팔십이 넘은 노인인데도 침 묻은 사과를 내민다는 것이다.
스무 개 남짓한 재벌가가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전체 국민을 먹여 살린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아무리 똑똑해도 재벌가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쌓지 못하면 서류 심사 자체에서 탈락이다. 재벌의 이세나 삼세들은 바로 경영진의 핵심멤버가 되어 서민들의 생업분야까지 빼앗아버렸다. 이게 우리사회 양극화의 현실이다. 연애와 결혼, 아이를 포기한 청년들을 자조적으로 ‘3포’라고 한다.
미국의 한 학자는 로마시대의 노예나 포드회사의 공원이 사실상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한국의 한 재벌회장은 사원들은 머슴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그런 머슴이 되기조차 하늘의 별 따기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개천에서 용이 날까봐 아예 콘크리트를 부어버린 세상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거대자본이 한국판 스티브 잡스를 탄생시킬 리가 없다. 사교육비 부담으로 가난한 집 자식들은 로스쿨까지 가기도 벅차다. 억대의 돈이 있어야 로스쿨이나마 다닐 수 있다. 겹겹의 장애물을 뚫고 성공해도 재벌가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는 게 성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봉건시대보다 더 정교한 신분제도가 사람을 얽매는 세상이다.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 등 계층이 많기도 하다. 명품 포장으로 천박한 계급을 과시하기도 한다. 우리 세대는 오륙십년 대의 절대적 가난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 그건 가난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함께 없었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이 많이 날아올랐다. 가난한 대학생이 오퍼상을 시작해 재벌이 됐다. 상고 출신이라도 고시를 통해서 대통령이 됐다. 그게 찬란한 꿈이 되어 수많은 가난한 청년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지금의 상대적 가난은 절대적 빈곤의 시대보다 사람들을 더 분노하게 하는 것 같다. 배고픈 것보다 배 아픈 게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있다. 분노의 압력이 폭발 직전인지도 모른다. 그 분출구가 필요하다. 나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없이 살아도 내면의 보물들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풍토가 와야 한다. 된장찌개를 앞에 놓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이건희 회장 형제보다 행복하다. 진달래가 옆에 있는 소나무를 부러워하지 않듯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변호사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