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주제 센 역할 벗고 밝은 에너지 ‘뿜뿜’…정경호와 로맨스 ‘찰떡’ 소화 중년배우 한계 극복
전도연은 ‘일타 스캔들’에서 가족을 위해 핸드볼 국가대표 자리를 포기하고, 고등학교 2학년 딸(조카)을 뒷바라지하는 열혈 엄마 ‘남행선’ 역을 소화하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은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꼽히는 서울 대치동 일대를 옮겨 놓은 부촌. 극성스러운 부모들 틈에서 결코 기가 죽지 않는 남행선은 하나뿐인 딸을 ‘모의고사 전교 1등’으로 만든 막강한 에너지까지 과시한다.
‘일타 스캔들’에서는 스크린에서 익숙했던 무겁고 어두운 전도연의 얼굴도 찾아볼 수 없다. 돈 많은 엄마들이 만든 카르텔에 밀려도, 딸의 학원비를 넉넉하게 주지 못해도, 특유의 밝은 기운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시청자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고된 일상을 코미디로 바꿔놓는 매력 덕분에 사교육 시장에서 ‘1조 원의 남자’로 불리는 일타강사 최치열(정경호 분)과 유쾌 통쾌한 사랑에도 빠진다.
로맨틱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전도연의 기운찬 에너지 덕분에 ‘일타 스캔들’ 시청률은 연일 고공 행진이다. 첫 방송에서 시청률 4.0%(닐슨코리아)로 출발해 매회 상승곡선을 그린 끝에 2월 5일 방송한 8회분에서는 최고치인 11.8%까지 올랐다. 주말 밤 방송하는 16부작 미니시리즈로 시청률 10%대에 안착하면서 최근 종영한 송중기 주연의 ‘재벌집 막내아들’을 잇는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17년 만에 도전한 로맨틱 코미디
전도연은 ‘일타 스캔들’ 제작발표회에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밝은 대본을 받았다”며 “그래서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전도연이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하기는 2005년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이후 무려 17년 만이다. 밝고 유쾌한 성격의 인물을 연기하기도 꼭 17년 만이다.
전도연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으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배우로는 처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 위상이 달라졌다. ‘칸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은 그에게는 주제의식이 분명한 무거운 작품들이 주로 전달됐다. 재벌가 가사도우미의 뒤틀린 욕망을 그린 영화 ‘하녀’, 마약 배달 혐의로 프랑스 교도소에 수감 된 주부의 실화를 옮긴 ‘집으로 가는 길’,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여자와 신분을 속인 형사의 사랑을 다룬 ‘무뢰한’,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가족의 이야기 ‘생일’ 등이다.
주제가 확실하거나 표현 수위가 센 장르물, 실화 바탕의 이야기를 주로 소화하면서 최고의 연기력을 과시했지만 한편으론 대중과 친밀함을 쌓을 기회를 점차 잃으면서 ‘어려운 배우’의 이미지가 쌓여 갔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인정받았지만, 내심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전도연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밝은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9년 JTBC 영화 예능 프로그램 ‘방구석 1열’에 출연해 “가볍고 재밌는 작품들을 하고 싶지만 아무도 내가 그런(재미있는) 사람인 걸 안 믿는 것 같다”며 “활발하고 유쾌한 실제 성격과 달리 작품 제안은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 적은 출연 분량에도 블록버스터 영화 ‘비상선언’에 참여하거나 우정출연 형식으로 재난영화 ‘백두산’에 출연한 것 역시 이미지 변신을 위한 시도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전도연의 모습?
전도연에게 ‘일타 스캔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드라마였지만 출연 제안에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감을 심어준 인물은 ‘일타 스캔들’의 극본을 쓴 양희승 작가다. 앞서 ‘고교처세왕’, ‘역도요정 김복주’, ‘한 번 다녀왔습니다’까지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로 실력을 인정받은 양 작가는 전도연에게 실제 모습을 이번 작품에 표현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전도연은 “나와 닮은 인물로 연기해보자”고 용기를 냈다. “(시청자들이) 어쩌면 한 번도 보지 못한 전도연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전도연의 예상은 적중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전도연의 모습이 시청자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면서 드라마의 인기도 오르고 있다. 전도연이 맡은 남행선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전매특허로 통하는 ‘캔디형’이지만, 누구보다 자립심이 강하고 상황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가족을 위해 핸드볼 국가대표를 접고, 반찬가게 사장님이 된 그는 특유의 손맛으로 ‘사교육 1번지’ 극성 엄마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심지어 섭식장애를 앓는 일타 강사 최치열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돌직구 오지랖’은 시청자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사한다. 자칫 억척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단 하나의 표정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는 전도연의 탁월한 감각은 ‘시청률’과 ‘입소문’으로 증명되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전도연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17년 만에 참여한 로맨틱 코미디인데도, 오랜 공백이 무색한 맹활약 덕분에 ‘돌아온 로코 퀸’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접어든 중년의 배우가 갖기 어려운 값진 수식어다.
전도연의 활약은 상대역인 정경호에게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지만, 극 중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찰진 호흡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도연과 탁월한 케미스트리를 과시하는 정경호는 그 힘을 전도연에게 돌렸다. 대선배 전도연의 출연 소식에 드라마에 합류했다는 그는 “요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하는데 전도연 선배님의 연기를 보면서 변하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며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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