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양장 같은 고갯길을 수없이 넘고서야 닿을 수 있는 충북 청주의 외딴 마을 벌랏.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다섯 대뿐인 이 오지마을에 제 발로 찾아 들어가 26년째 살고 있는 이가 있다.
도인 같은 풍모의 닥종이 예술가 이종국 씨(61)다. 그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뒤 도시에서 꽤 호황을 누리던 미술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쳇바퀴 같은 도심의 일상에 넌더리를 치며 내게 맞는 땅에서 나답게 살 방안을 고민하던 차 벌랏에 정착한다.
첩첩한 산과 물에 가로막힌 고립무원의 오지지만 그 덕에 아름다운 자연이 온전히 남아 있는 벌랏이야말로 '나'라는 씨앗에 딱 맞는 터라고 직감했단다. 운명처럼 만난 벌랏의 산밭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 닥종이 작가로서의 인생 2막을 연 이종국 씨. 그는 벌랏이라는 자연 속에서 차곡차곡 내 삶의 무늬를 새겨나가고 있다.
벌랏의 자연 속에서 옛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던 도인 같은 남자에게 어느 날 한 여인이 바람처럼 찾아왔다. 전 세계를 떠돌다 벌랏에까지 오게 됐다는 명상가 이경옥 씨다.
그녀는 이종국 씨와 운명처럼 부부의 연을 맺고 벌랏의 자연에서 건강을 회복해 마흔넷의 나이에 아이까지 얻었다.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 이선우 군(19)이다.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벌랏에서 17년 만에 새로 태어난 기적 같은 아이 선우는 벌랏의 바람에도 키가 한 뼘씩 자랐고 가족은 벌랏의 자연 속에서 먹고, 입고, 생활하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아내 경옥 씨가 큰 병에 걸리면서 여러 해 투병 끝에 결국 벌랏의 자연으로 돌아갔다. 죽음 또한 자연의 한 조각이라던 그녀는 "바람과 햇살처럼, 별과 달처럼 곁에 있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아내는 영영 떠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여러 모습으로 항상 곁에 있다는 믿음으로 종국 씨 부자(父子)는 아내 같고, 엄마 같은 벌랏의 자연에서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도, 사람이 죽어 염을 할 때도, 생사고락의 순간마다 종이가 빠지지 않았다. 예부터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많이 생산하던 마을 벌랏. 오래전 그 맥이 끊겼지만 이종국 씨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옛 방식 그대로 닥농사를 짓고 종이를 뜨면서 한지를 부활시켰다. 한지가 자연 그 자체인 점도 좋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이어준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단다.
종이 외에도 옛사람들이 그러했듯 웬만한 세간은 만들어 쓴다는 그. 필요한 게 생기면 '어디서 살까' 대신 자연의 재료로 '어떻게 만들까'를 먼저 고민한다. 댓잎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칡넝쿨로 만든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서면 벌랏의 산들과 어깨동무하며 걷는 것 같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자연에 있다'는 게 종국 씨의 철학. 번거로운 수고가 필요하지만 그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움이 있단다. 무엇보다 흙집, 오지그릇, 댓잎 빗자루 등은 훗날 쓸모를 잃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무해하고 더없이 평화롭단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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