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진 1987년 12월 16일 하루 전에 마유미가 서울로 압송돼 왔다. 노태우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여권 김현희 사건 조작설’이 돌기도 했다. 경향신문·보도사진연감 |
“그때 김현희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여러 해가 지났을 때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언론사에서 김현희를 인터뷰하면서 나에게도 질문을 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발 조심해’라는 말을 했다고 대답하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당시 김현희 못지않게 내 머리도 부스스했다. 기자들이 그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바레인 호텔에서 머리를 감았을 때 물이 나빠 머리카락이 엉겨 붙던 일을 생각했다. 머리를 감았으나 빗질이 되지 않았고 비행기 안에서도 내 자신에 대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태로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사진이 찍혔으니 나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내 얼굴이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날의 주인공은 마유미였다. 그러나 마유미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사진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방송에까지 나갔다. 신문을 보고 누구보다 놀란 것은 우리 부모님이었다.
마유미는 고의로 넘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해나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갈랐다.
현장에서는 인터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유미에 대해서는 우리도 조사조차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현장에 있던 안기부 수사관들이 우리를 차로 인도했다. 우리는 서둘러 대기해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뒷좌석 가운데 마유미를 앉히고 왼쪽에는 내가, 오른쪽에는 남자 수사관이 같이 탔다.
“출발해.”
한영수 과장이 지시했다. 우리 앞에 있던 차가 먼저 떠나고 다음에 우리 차가 출발했다. 경호를 하는 차들과 호송 팀 차들도 뒤따라왔다. 우리를 태운 차가 출발하자 여러 대의 방송국 차량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 이젠 우리가 기자들의 보도차량을 피해서 달아나야 할 형편이었다.
승용차는 빠르게 공항을 벗어나 올림픽대로로 들어섰다. 한강과 행주산성이 차창으로 지나가자 비로소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마유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서울이야. 한번 쳐다봐.”
나는 여유가 생겨 마유미에게 말을 건넸다. 마유미는 서울에 관심이 없는지, 수사관들에게 저항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차는 한강변 올림픽대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이제야 들었기 때문인지 겨울이지만 따뜻한 서울 오후의 햇살이 나에게는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방송국 차량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차가 시내로 들어서고 조금 더 달리자 저만치 안기부 출입문이 보였다. 우리는 여느 피의자들을 호송해 올 때와 마찬가지로 김현희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혹시 정문에는 미리 기자들이 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남산 쪽으로 난 후문으로 들어갔다. 도착하자 수사국 조사실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수사팀이 미리 준비해놓은 조사실로 그녀를 데리고 가도록 인도했다. 마유미는 시종일관 힘을 빼고 우리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왔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체념이 아니라 강한 저항의 표시로 느껴졌다. 안기부에 도착하자 나는 집에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조사실은 세 평 남짓 되었다. 일인용 침대와 책상 2개, 작은 소파 세트,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는 눈물과 침을 흘리고 있는 마유미를 침대에 앉혔다. 새로 꾸려진 수사팀 중 몇 명이 조사실로 들어와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고 상부에서는 그녀가 안정할 수 있도록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당분간 그대로 두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와 채명희는 바레인에서 돌아온 복장 그대로 곧장 수사에 투입되었다.
잠시 후 의무실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와 그녀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건강상 특별히 이상은 없었으나 그녀의 무릎이 문제였다. 아픈 표시를 하는 그녀의 바지를 걷어 올리자 무릎이 멍들고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가 바레인에서부터 도착할 때까지 엉거주춤해 있었던 것은 바로 무릎의 통증이 원인이었다. 의사가 안티푸라민 연고를 주었다.
“이걸 무릎에 바르고 뜨거운 물로 찜질해 주면 좋아질 거야. 대수롭지 않아.”
▲ 김현희가 최창아 씨에게 보낸 여러 카드들. 김현희는 바레인에서부터 자신을 호송했던 최 씨와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제공=최창아 씨 |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유미는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유를 마셔요. 목이 마르지 않아요?”
그녀는 조금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입에 물을 갖다가 대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못 이기는 체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느 나라 사람이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쉽게 갑시다. 버텨봐야 서로 힘들지 무슨 소용이 있소?”
수사관들이 다투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고들 했어. 밥도 못 먹었다면서? 우선 밥부터 먹어.”
호송 팀은 비행기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불과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밥을 보자 너무나 기뻤다. 몇 시간이 지나가자 수사국장의 호출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국장실로 들어갔다.
“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 같아?”
국장은 우리에게 다짜고짜 그 질문부터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창아 씨도 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어?”
수사국장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북한의 공작원이 틀림없는데 북한 사람인지는 조사를 하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마유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작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면 비행기에서라도 조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모두들 수고했어. 당분간 퇴근하지 말고 조사를 해야 할 거야.”
수사국장은 몇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하더니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수사관들은 보통 격일이나 이틀 간격으로 24시간 수사를 하고 교대로 하루씩 쉬지만 KAL기 사건은 워낙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처음 일주일은 교대조차 할 수 없었다. 수사에 투입된 인원도 보통 사건의 3배 정도나 되었다.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수사뿐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신문에 보도되는 기사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추측성 기사도 많았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흘린 기사도 있었다.
“마유미가 딸기를 좋아한다고? 이게 말이 돼? 이런 기사가 어떻게 신문에 실린 거야?”
그런 기사가 나갈 때마다 우리는 상부로 불려가 호되게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수사 상황을 누설한 일이 없었다. 조사실 분위기가 비슷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안기부에서 흘러 나간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자 뜻밖에 안기부 수사국이 아니라 최상부에서 흘려보낸 것이었다.
나는 때때로 안기부가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그것은 음지에서 국가를 위하여 묵묵히 일을 하는 요원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김현희 조작설 논란이 많은 것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대통령선거 하루 전에 서울로 압송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유미의 압송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훗날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에서 김현희 사건을 재조사하고 그녀의 압송이 여당의 선거 전략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는 경악했다. 정치권이 마유미를 선거일 전에 압송을 해오라고 인기부에 압력을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레인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얽혀 있고 대형여객기 폭파사건은 국제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어서 단순하게 한국 정치권의 요청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요원들은 대형 참사를 일으킨 범인을 하루빨리 압송하여 조사를 하고 싶었다. 대통령후보를 위하여 우리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사 임무를 맡고 있는 요원들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유미를 압송해 온 것은 12월 15일이었고 다음 날이 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였다. 우리는 서로 교대로 집에 가서 투표를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도 집에 가서 투표를 했다.
“네가 마유미 데리고 온 거야? 신문에도 네 사진이 나왔어.”
집에서는 부모님들이 나를 보고 난리였다. 사실 대부분의 신문 1면에 마유미의 팔짱을 끼고 있는 내 얼굴이 실려 있었다. 가족들이 이것저것 물었으나 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투표소로 가서 선거를 했다. 투표를 한 뒤에는 다시 안기부 조사실로 돌아왔다. 대통령선거에는 우리도 관심이 많았다. 무엇보다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뽑기 때문에 이야깃거리도 조사실에서도 선거 이야기를 자주 했다. 노태우 후보와 3김의 대결로 선거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 밤 개표가 시작되었다. 어느 때보다 비상한 관심 속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게 되었다. 밤 10시가 지나자 노태우 후보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후보의 분열로 야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마유미의 국내 압송이 대통령 선거에 도움이 됐을 거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당시 그것이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정리=이수광 작가